【 청년일보 】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증권 사장, 우리금융지주 회장, KB금융지주 회장을 거친 국내 금융계의 거물이 아동복지단체의 수장이 됐다. 지난 2022년 8월 초록우산 제10대 회장으로 취임한 황영기 회장의 이야기다.
취임 첫날부터 초록우산의 변화를 시작됐다. 어찌보면 예상된 일이였다. "왜 이렇게 하지? 왜 다르게 못 하지?". 기업인의 DNA가 복지 현장을 만난 순간부터 초록우산의 변화는 당연했던 셈이다. 단순 지원을 넘어 법을 만들고, 시스템을 바꾸고, 정부와 빅테크에 책임을 요구한 기관으로 변모되는 한편 그 위상 역시 달라졌다. 초록우산에 공식 취임한 지 3년이 지난 지금, 황 회장을 만나 그 변화의 비결과 그의 비전을 들어보았다.
◆ "Why not?"…경제 전문가가 복지 현장에 던진 질문
황 회장은 취임 첫해를 '질문의 시간'으로 회고했다. 그는 취임 후 전임 회장의 경영 계획을 1년간 그대로 집행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그 1년 동안 자문했다. 질문은 '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못하고 지엽적인 해결만 하고 있는가'였다.
황 회장은 "복지단체 사람들은 착한 마음으로 주어진 여건을 받아들이고, 이 안에서 뭘 할 수 있을지 노력한다"며 "그런데 저는 기업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니 Why not? 왜 이렇게 하지? 왜 다르게 못 하지? 이건 왜 이렇게 돼 있지? 이런 질문을 자꾸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꺼낸 사례는 가족돌봄아동이었다. 부모가 이혼해 할머니 집에 맡겨진 아이는 병든 할머니를 위해 약을 타러 다니고, 할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느라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황 회장은 "이런 아이들이 대한민국에 있으면 안된다, 이것은 국가의 책임이다, 가족돌봄아동을 돌보는 법을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해서 실제로 법을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이에 초록우산은 4년간의 활동 끝에 지난해 3월 가족돌봄 등 위기아동·청년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을 이끌어냈다. 국가가 가족돌봄아동을 직접 찾아 통계를 잡고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법에 명기됐다.
황 회장은 "직원들이 고생도 많이 했고, 많은 의원님들이 도와주셨다"고 전했다. 이어 "법이 만들어 졌지만, 실제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초록우산의 역할은 그사이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아이들을 최대한 돕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황 회장이 정의하는 초록우산의 역할은 법을 만드는 것과 그 법이 현장에 닿기까지의 간극을 채우는 것이었다.
◆ "결혼하고, 아이 낳고, 내집 마련까지"…'자립'이란 개념의 재정립
황 회장은 "우는 아이한테 손수건과 빵을 주는 것으로 임무를 다 했다고 하면 안 된다"고 밝혔다. 한 명의 가족돌봄아동을 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성장하도록 돕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까지가 진짜 임무라는 의미다.
자립준비청년 문제가 대표적이다. 매년 약 3천명의 아이들이 만 18세가 돼 전국 아동보호시설과 그룹홈을 떠나 사회로 진출한다. 정부는 각 지방자치단체가 500만원에서 2천만원에 이르는 자립지원금을 주는 것으로 1차 해결책으로 삼는다.
이에 황 회장은 "아이들에게 현금을 쥐여주고 알아서 하라고 하면, 그건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이라며 "18살이 된 아이들이 대책이 없이 직장도 못 구하고 방황하는 건 사회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초록우산은 이 청년들에게 매월 10만원을 지원하는 동시에 약 300명의 청년에게 멘토를 붙인다. 멘토는 은행 계좌 만드는 방법이나 신용카드를 발급받는 방법부터 시작해 "형, 나 이거 어떻게 해야 돼"라고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황 회장은 "이 친구들이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적당한 때 결혼하고, 아이 낳고, 자기 가정과 집을 가질 수 있도록 꾸준히 지원하는 것도 우리의 미션에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호흡이 굉장히 길다"고 밝혔다.
재능은 있지만 돈이 없는 아이들을 위한 '아이리더' 사업도 같은 철학 위에 서 있다. 초록우산은 16년간 4천여 명을 발굴해 음악·미술·체육 레슨비, 기차비, 해외 공연 경비 등을 지원했다. 입상 여부는 따지지 않는다. 황 회장이 그리는 초록우산은 아이에게 꿈을 찾아가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다.
◆ 아동 행복의 '화룡점정'... 온라인 공교육 강화 통한 "교육 불평등 해소" 강조
인터뷰에서 황 회장은 교육 불평등 문제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아동 행복을 이야기하면서도 늘 가슴속에 구멍이 하나 뻥 뚫려 있는 게, 교육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아동의 행복은 없다는 것"이라며 "대학 입시부터 해서 아동들이 교육 지옥에 빠져 있다"고 역설했다.
초록우산은 최근 전국 모든 시군구 등 지자체를 대상으로 의료·교육·안전·커뮤니티(아동 인프라) 등 4개 부문을 평가한 '아동성장환경지표'를 발표한 바 있다. 지자체 단위로 들여다보니 아동복지 수준의 격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는 것이 황 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소득 격차가 교육 접근성의 격차로 나타나고, 사는 지역에 따라 학업과 진학 전반에 큰 차이가 발생한다"며 "아이들한테 너무 가혹하다"고 분석했다. 이어 "아이들은 공부에 대해서는 최소한 균등한 액세스를 가져야 한다"며 정부·여당 차원의 온라인 공교육 강화를 통한 구조적 해결을 제안했다.
◆ 과도한 상속세, 개인 기부를 막는 구조적 장벽...유산기부 활성화로 '기부 생태계' 변화 도모
황 회장은 초록우산 회장을 비롯해 한국자선단체협의회 이사장도 겸임하고 있다. 기부 생태계 전반을 들여다보는 자리다. 그가 진단하는 한국 기부 시장의 구조적 문제는 명확하다. 법인 기부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하면 전액을 손비(비용)으로 인정받지만, 초록우산 같은 민간 복지단체에 기부하면 10%밖에 인정되지 않는다.
과도한 세부담이 고액 자산가의 개인 기부를 막는 구조적 장벽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기부하는 게 아니라 빌 게이츠가 기부한다"며 "우리는 그 반대"라고 말했다. 이어 "상속세가 합리적인 수준이라면 고액자산가가 세금을 내느라 재산을 현금화 대신 개인 이름으로 기부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현재 가장 공을 들이는 과제는 '유산기부 활성화'다. 영국의 '레거시 텐(Legacy 10, 유산의 10% 이상을 기부하면 납부 세액에서 10%를 추가 감면해주는 제도)를 한국에 도입하려는 것이다. 그는 "영국은 2012년 이 제도를 도입한 뒤 12년 만에 유산 기부액이 2배가 됐다"며 "과표 공제에 더해 납부 세액의 10%를 경감해주는 것이 사람들을 움직였다"고 설명했다.
◆ 온라인 세이프티·마음 건강·글로벌 NPO…다음 10년의 의제
황 회장이 올해 집중 과제로 꼽은 것은 '온라인 세이프티'다. 그는 "호주, 스페인 등은 16세 이하 아동의 SNS 사용을 금지한다"며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이 디지털 시대에 뒤쳐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부모들이 나서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전면 금지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한 황 회장은 현실 가능한 경로를 택했다. 조인철 의원(광주)과 협력해 세 가지 핵심 의무를 빅테크 기업에 부과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피해 신고 시 48시간 내 불법 콘텐츠 삭제, 아동 계정 위험 감지 시스템 의무화, 의무 위반 시 과태료 부과가 그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초록우산은 '마음 건강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영유아부터 고등학생까지 아이들이 게임처럼 스스로 정신 건강 점수를 체크하고, 점수에 따라 온라인 솔루션을 제시하며, 심각한 경우 전문 심리치료로 연결하는 예방 플랫폼이다.
국제 무대에서의 행보도 가속화하고 있다. 초록우산은 세계은행이 신탁 관리하는 글로벌 교육 파트너십(GPE)의 아시아 NPO 최초 기금 집행기관(GA)으로 선정됐다. 캄보디아·르완다·베트남·필리핀 4개국에 현지 사무소를 개설하고, 내년에는 한국을 포함한 국가 간 아동행복지수 비교 연구도 발표할 계획이다.
10년 후에도 아동 문제가 없어질 것 같지 않다는 황 회장은 "정부의 손은 두꺼워서 섬세한 처리를 잘 못한다"며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는 아이들은 결국 현장의 복지단체가 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황 회장은 "모든 국민이 1년에 한 번은 기부하는 나라, 대한민국 하면 전 국민이 한 번씩은 기부하는 나라, 아름다울 것 같다"고 전했다.
【 청년일보=대담 강필수 부장 / 글·정리 김주미 기자 / 사진 조성현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