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우리나라에 건강보험 제도가 처음 뿌리를 내린 시기는 지난 1977년이다. 500인 이상 대규모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조합제도가 그 시작이었다.
이후 점진적인 확대 과정을 거쳐 1989년 7월 마침내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한 의료보험이 만들어졌다. 지난 2000년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 통합 출범하며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가장 체계적인 사회안전망으로 자리 매김했다.
건강보험 제도의 본질적인 취지는 명확하다. 예기치 못한 질병 또는 부상으로 가계가 파탄 나거나 치료를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사회 구성원 모두가 위험을 분산하고 국민보건 향상 및 사회보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를 지탱하는 핵심 기준이 바로 '의학적 필수성'과 '급여 우선순위'다. 생명과 직결되거나 고액의 진료비가 소요되어 개인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질환에 건강보험 재정을 우선 투입하는 것이 제도의 대원칙이다.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불 지펴졌던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급여화' 추진은 이러한 건강보험 제도의 근간을 정면으로 흔들었다. 청년층 표심을 의식한 포퓰리즘적 접근이라는 비판 속에서 추진되던 이번 정책은 결국 각계각층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탈모(毛)와 포퓰리즘을 합친 '모퓰리즘'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건강보험 활용의 원칙보다 정치 논리가 우선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졌다.
탈모는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도 자가면역질환 등 병적 원인이 명확한 원형탈모에는 건강보험이 적용되고 있다. 다만 유전성 탈모와 노화로 인한 탈모는 비급여로 분류된다.
당초 지난 7월 행전안전부와 보건복지부가 탈모약 급여 확대를 주제로 '모두의 토론회'를 열 예정이었으나, 비판 여론이 심상치 않자 토론을 급하게 취소했다.
정부는 재정의 현실을 무시한 채 무리하게 정책을 추진하다 브레이크가 걸렸다. 토론회 취소로 탈모약 건강보험 적용 추진화는 사실상 무산 절차를 밟게 됐다.
현재 건강보험 재정 누적 준비금은 고령화 여파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머지않은 시점에 대규모 적자가 예고된 상태다.
구체적인 예산 추계나 재정 대책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채 "탈모는 생존의 문제"라는 감성적 수사만 앞세워 건강보험 적용을 밀어붙인 것은 무책임한 행정의 전형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선순위의 전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암, 희귀, 난치성 질환 환자들은 비싸고 혁신적인 신약이 눈앞에 있음에도 건강보험 급여 등재가 늦어져 하루하루 생사의 기로에서 고통받고 있다.
탈모는 생명과 무관하며 비교적 저렴한 복제약으로 관리가 가능하다. 이러한 탈모약에 건강보험 재정을 쏟아붓는 것은 당장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는 이들의 목숨을 외면하는 격이라는 중증질환자들의 절규를 정부는 뼈아프게 새길 필요가 있다.
여론의 거센 반발과 우려 속에 탈모약 건강보험 추진은 제동이 걸렸다. 이번 사태는 정책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 어디어야 하는지 다시금 가르쳐 준다.
표심을 흔드는 달콤한 포퓰리즘 구호보다 무너져가는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 가능성부터 점검해야 한다. 정말로 도움이 절실한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재원을 집중하는 상식과 공정이 바로 서야 할 때다.
【 청년일보=맹봉주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