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컬럼]美 취업 비자 제도 딜레마…한국 기업의 '고질병’

등록 2025.09.15 08:00:05 수정 2025.09.15 08:00:51
이성중 기자 sjlee@youthdaily.co.kr

'비자 재앙' 반복될 가능성 농후, 정부 업계 풀어야 할 과제

 

【 청년일보 】 미국 조지아주에서 벌어진 현대자동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 근로자 구금 사태는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불법 취업 단속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구조적 문제가 얽혀 있다.

 

수십조 원을 투자하며 미국의 경제와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는 우리 기업들이 왜 정식 비자가 아닌 편법에 의존해야 했는지, 그리고 이 사태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경고음은 무엇인지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B-1 단기 상용 비자와 전자여행허가(ESTA)의 오용에 있다. 애틀랜타 건설 현장에 파견된 수백 명의 한국인 근로자들은 취업 비자인 H-1B, L-1 비자 대신 단기 방문 목적의 비자로 입국했다.

 

B-1 비자는 회의 참석이나 계약 체결 등 상업적 활동을 허용하지만, 급여를 받거나 직접적인 노동에 참여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다. 마찬가지로 ESTA 역시 관광 및 비즈니스 목적의 단기 체류를 위한 제도다. 기업들은 왜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편법을 택했을까?

 

가장 큰 원인은 복잡하고 경직된 미국의 취업 비자 제도에 있다. 첨단 기술 인력에게 발급되는 H-1B 비자는 매년 발급 쿼터가 제한돼 추첨을 통해 선발된다.

 

최근 몇 년간 경쟁률은 10대 1을 훌쩍 넘길 정도로 치솟았다. 이는 비자 발급에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추첨에 탈락하면 아예 비자를 받을 수 없다는 불확실성을 낳는다. 특히 공장 건설과 같이 시급한 인력 투입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비자 추첨 결과를 마냥 기다릴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주재원 비자인 L-1 비자는 쿼터가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국 본사에서의 최소 1년 이상 경력 요건과 관리직 또는 전문 지식 소유자라는 직무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모든 현장 기술 인력이 이 요건을 충족하기는 쉽지 않다.

 

이처럼 까다로운 비자 제도를 우회하기 위해 기업들은 과거부터 단기 비자를 통해 인력을 파견하는 관행을 이어왔다. '잠시 머물다 가는' 인력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안이한 판단이 이번 사태를 키운 원인이 됐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자국민의 일자리 보호를 위해 이민 정책 기조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번 단속은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해석된다.

 

여행업계 관계자는 “현재 미국은 H-1B 비자 발급에 대해 매년 8만 5천 명이라는 제한을 두고 있어 기업들 입장에선 전문 인력의 정상적인 파견이 어려워 편법을 택했다”며 “이번 사태와 같은 일들은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계속 반복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이번 사태는 단발성 해프닝이 아닌, 향후 대규모 대미 투자를 앞둔 한국 기업들에게 중요한 경고음을 울렸다. 정부와 관련 기업, 경제 단체들은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에 서둘러 나서고 있다. 정부는 사태 직후 외교부의 현지 공관을 중심으로 구금된 근로자들의 신병을 확인하고, 미국 측과 자진 출국을 협의해 강제 추방에 따른 불이익을 최소화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 상무부와 비자 제도 개선을 위한 실무 협의에 착수했다. 산업부는 단기 파견 인력을 위한 새로운 비자 카테고리 신설 또는 기존 비자 요건의 유연화 등을 논의하며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파견 인력에 대한 비자 발급 및 운영 시스템을 전면 재점검하고 있다. 향후에는 편법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파견 인력이 정식 취업 비자를 취득하도록 하는 등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막대한 투자가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인력 운영이 필수적이라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우리 정부와 기업이 해외 투자 과정에서 겪는 비자 문제의 심각성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앞으로 유사한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면 정부의 적극적인 비자 외교, 기업의 법 준수 원칙 확립이 필수적이다.

 

또한, 해외 진출 기업들이 비자 문제에 대한 최신 정보를 공유하고, 정부에 공동으로 건의할 수 있는 협력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대한상의와 전경련 등 경제 단체가 이 역할을 주도해 개별 기업들이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번 일은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 성공을 위해 기술력과 자본뿐만 아니라, 현지 법규와 제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준수가 필수적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향후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더욱 안정적으로 성장하려면 이 '고질병'을 뿌리 뽑는 데 정부와 기업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청년일보=이성중 기자 】




저작권자 © 청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선유로49길 23, 415호 (양평동4가, 아이에스비즈타워2차) 대표전화 : 02-2068-8800 l 팩스 : 02-2068-8778 l 법인명 : (주)팩트미디어(청년일보) l 제호 : 청년일보 l 등록번호 : 서울 아 04706 l 등록일 : 2014-06-24 l 발행일 : 2014-06-24 | 편집국장 : 성기환 | 고문 : 고준호ㆍ오훈택ㆍ고봉중 | 편집·발행인 : 김양규 청년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19 청년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admin@youth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