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유리와 강철로 빛나는 혁신의 도시 한복판, 반짝이는 캠퍼스와 자율주행차가 오가는 거리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면 뜻밖의 풍경이 펼쳐진다. 실리콘밸리의 심장 쿠퍼티노 공원 한켠, 이름 모를 젊은이들의 희생을 새긴 작은 돌 하나가 조용히 서 있다. 알지도 못했던 나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바다를 건넜던 이들의 선택을 기리는 기념석이다. 첨단 기술이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에도 그 오래된 약속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우리에게 '자유의 무게'를 묻고 있다. [편집자 주]
쿠퍼티노 메모리얼 파크(Cupertino Memorial Park)의 한국전쟁 기념석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정신만큼은 여전히 또렷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실리콘밸리 방문 계획이 있다면 애플 파크(Apple Park)의 유려한 곡선을 바라보기 전, 이 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는 '쿠퍼티노 재향군인 기념 공간(Cupertino Veterans Memorial)'에 들러 잠시 고개를 숙여보는 여정도 의미 있을 것이다.
세계 IT 산업의 메카이자 '애플(Apple)'의 심장부로 불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Cupertino).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약 40분을 달리면 도착하는 이 도시는, 인구 약 6만명 규모의 비교적 작은 도시지만 주민 상당수가 아시아계로 구성된 평화로운 생활 도시이기도 하다. 이런 일상적인 풍경 속 공원 한가운데, 머나먼 동방의 작은 나라를 위해 낯선 전장에 뛰어들었던 이들을 기리는 보훈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공원 한편에 마련된 '쿠퍼티노 재향군인 기념 공간'은 잔디와 나무들에 둘러싸여 조용히 놓여 있다.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고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는 풍경 사이로, 미국이 참전한 여러 전쟁의 흔적을 새긴 자연석과 조형물들이 둘러서 있다. 그중에서도 한국인 방문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은 단연 한국전쟁을 기리는 기념석이다.
◆ 청동 조형물 '수호자'…등을 맞댄 두 '네이비 실'
기념 공간 입구로 다가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호자(The Guardians)'로 불리는 청동 조형물이다. 두 명의 미 해군 특수부대 '네이비 실(Navy SEAL)' 대원이 서로 등을 맞댄 채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는 이 형상은, 언제 어디서든 동료를 지키기 위해 등을 내어주는 전우의 자세와 군인의 헌신을 상징한다.
실존 인물인 매튜 액셀슨과 제임스 서를 형상화한 이 조형물은, 실리콘밸리의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조형물 주변에는 미국이 겪었던 주요 전쟁들을 기념하는 돌들이 둘러서 있어,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한 전쟁사의 단면을 마주하게 된다. 그 가운데 한반도 지도를 새긴 한국전쟁 기념석은, 이 작은 도시와 머나먼 한반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알지도 못한 나라, 만나본 적 없는 국민을 위해"
오랜 세월의 흔적과 새들의 배설물 자국이 그대로 남은 한국전쟁 기념석에는, 한반도 지도와 함께 짧지만 울림이 큰 문장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고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부름에 응했던 우리 아들, 딸들의 헌신을 기립니다.(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이 구절은 미국 워싱턴 D.C.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에도 새겨진 문장으로, 당시 미국 청년들이 '코리아(KOREA)'라는 이름조차 낯설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역만리 전장으로 떠났던 현실을 압축해 보여준다. 국경도, 언어도, 문화도 달랐던 이들이 '알지도 못했던 나라, 만나본 적 없는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짧은 문장 속 '부름에 응했다(answered the call)'는 표현에 응축돼 있다.
쿠퍼티노의 기념석은 화려한 장식이나 웅장한 규모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겉으로는 소박하고 다소 초라해 보일 정도로 조용히 놓여 있지만, 그 앞에 서면 먼 나라에서 흘린 피와 땀, 그리고 남겨진 이름 없는 이들의 삶이 묵묵히 전해져 오는 듯하다.
◆ 풍요의 이면에서 마주한 '자유의 무게'
쿠퍼티노와 같은 미국의 작은 도시들에서도 누군가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향했다는 사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 그리고 실리콘밸리가 상징하는 기술 문명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선물이 아니었다. 70여년 전, 이름조차 생소한 나라를 향해 떠나야 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선택과 희생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반짝이는 캠퍼스와 최첨단 기술 기업들 사이를 걷다 보면, 전쟁과 희생, 기억과 책임 같은 단어들은 잠시 머릿속에서 밀려나기 쉽다. 하지만 쿠퍼티노 메모리얼 파크의 이 작은 기념석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문장을 곱씹어 보면, 우리가 너무 쉽게 소비해온 '자유'라는 단어의 무게가 다르게 다가온다. 자유는 한 번의 승리로 영원히 보장되는 상태가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 위에 간신히 지켜낸 균형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를 찾는 이들에게 이곳 방문은 거창한 의식이라기보다, 바쁜 일정 중 몇 분간의 침묵과 성찰에 가깝다. 애플 파크의 유려한 건축미와 거대한 데이터 센터, 자율주행차와 인공지능 신기술을 둘러본 뒤, 쿠퍼티노 재향군인 기념 공간에서 '알지도 못했던 나라와 사람들'을 위해 싸웠던 이들의 이름 없는 얼굴들을 떠올려 보는 것.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의미는 이전과 조금 다른 빛깔로 다가올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자유를 둘러싼 갈등과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 불렸던 한국전쟁의 흔적을 실리콘밸리 한복판에서 마주하는 일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조용히 일깨우는 작은 이정표다. 그리고 그 이정표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행위 자체가, 70여년 전 부름에 응했던 이들에게 우리가 건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감사의 표현일 것이다.
【 청년일보=조성현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