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지난달 국회에서 건설산업 관련 법안이 60건 가까이 쏟아졌지만, 정작 산업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보여주기식 입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발의된 법안의 절반이 규제와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채워졌지만, 비용 보전 등 현장의 구조적 문제를 외면한 채 '처벌 수위'만 높이는 방식으로는 실질적인 산재 감축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지난달 28일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하 건산연)이 발표한 '건설동향브리핑'에 따르면, 올해 10월 30일부터 11월 24일까지 국회에 발의된 건설산업 관련 법률안은 총 59건으로 집계됐다.
이 중 건설안전 관련 법안이 29건에 달했으며, 특히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18건으로 전체의 약 30%를 차지하는 등 규제와 처벌 강화 중심의 입법 경향이 뚜렷했다.
◆ "처벌만이 능사인가"... 반복되는 규제 강화의 한계
최근의 입법 흐름은 지난 7월 국무회의와 9월 정부의 '노동안전 종합대책' 발표 이후, 안전 규제와 제재를 강화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특히 지난 7월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적인 산재 사망 사고는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며 "이런 후진적인 산재를 영구적으로 추방해야 한다. 연간 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일하다 죽는다고 하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하게 질타하며 분위기가 급변했다.
이후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와 고용노동부는 전국 건설현장에 대한 감독을 대폭 강화하고 지자체와 협업 체계를 구축하는 등 감시망을 촘촘히 하는 한편, 관련 법령과 규칙까지 잇달아 손질하며 중대재해 근절에 배수진을 쳤다.
지난달 발의된 주요 법안을 살펴보면 ▲지방자치단체에 근로감독 권한 부여(근로감독관 직무집행법 제정안 등) ▲건설공사 기간 연장 사유에 폭염·한파 등 기상재해 추가 ▲연간 3명 이상 사망사고 발생 시 영업이익의 5% 과징금 부과 등이 포함됐다.
전영준 건산연 연구센터장은 보고서를 통해 "건설공사 산재를 막기 위해 단순히 '산업안전보건법'만 개정하는 것은 단편적 접근의 반복"이라고 꼬집었다.
건설현장의 안전 문제는 '건설산업기본법', '건설기술 진흥법', '하도급법', '국가계약법' 등 다양한 법령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특정 법안의 처벌 강화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분석이다.
◆ '폭염 공기 연장' 법안, 비용 문제 빠진 '반쪽짜리'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잇따라 발의된 '폭염·한파 시 공사기간 연장' 관련 법안들이다.
지난 11월 5일 김주영 의원 등 11인은 '산업안전보건법' 일부개정안(제13917호)을 발의했다. 현행법은 태풍·홍수만 공사기간 연장 사유로 명시하고 있어, 폭염이나 한파로 작업을 중단했을 때 시공사가 불이익을 받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취지다.
최근 산업안전보건기준이 강화되어 체감온도 33도 이상 시 휴식, 35도 이상 시 작업 중지가 의무화된 만큼, 이를 법적 불가항력 사유로 명확히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건산연은 이번 개정안이 현장의 근본적인 고충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라고 지적한다.
전 센터장은 "이미 공사계약일반조건 등 계약 예규상에는 폭염과 한파가 불가항력 사유로 규정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법적 근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발주자가 공기 연장에 따른 간접비(현장 유지비, 임대료 등) 증액을 인정하지 않는 관행 때문에 현장이 멈추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한 대형건설사 관계자는 "공기 연장을 신청하면 발주처는 기간만 늘려줄 뿐, 그 기간 동안 발생하는 현장 관리비나 임대료 등 추가 비용은 시공사의 몫"이라며 "비용 보전이 강제되지 않는 공기 연장은 사실상 시공사에 손해를 떠넘기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또 다른 건설사 현장소장 역시 "민간 공사에서 날씨를 이유로 공사비 증액을 요구했다가는 다음 수주가 막힐 수 있다"면서 "단순히 연장 사유를 명시하는 것을 넘어, 이에 수반되는 간접비 지급을 의무화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즉, 작업 중단에 따른 비용 보전 절차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기간 연장'만 법에 명시할 경우, 시공사는 손실을 피하기 위해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 "규제 효과 검증해야"... '사후 규제영향평가' 도입 시급
건산연은 무분별한 규제 양산을 막고 산업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사후 규제영향평가' 제도의 정식 도입을 촉구했다.
사후 규제영향평가는 규제가 시행된 이후 실제 현장에서 의도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 혹은 불필요한 부작용을 낳고 있지는 않은지를 체계적으로 검증하는 제도다.
현행법상 규제를 신설할 때는 사전 분석이 의무화돼 있지만, 정작 법 시행 이후에는 사회·경제적 여건 변화나 기술 발전 등을 반영해 규제의 타당성을 재검토할 수 있는 장치가 부재하다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건산연은 규제 도입 전의 사전 분석뿐만 아니라, 규제 시행 후 실제 효과와 목적 달성 여부를 평가하는 사후 평가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불필요한 규제를 걷어내고 실질적인 안전 확보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현재 건설산업에는 29개 이상의 법률과 5천594개에 달하는 규제 조문이 적용되고 있다.
전 센터장은 "22대 국회 들어서만 월평균 20건의 규제 신설·강화 입법이 쏟아지고 있다"며 "이 중 상당수는 중복 규제이거나 과도한 처벌을 포함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현재 정책은 '채찍'만 있고 '당근'은 빠져 있어 업계 전체가 위축된 상태"라며 "과거 일부 기업이 무재해 달성 시 인센티브를 준 사례처럼, 정부도 처벌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전년 대비 재해율을 줄인 시공사에 공공 입찰 가점을 주는 등 확실한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청년일보=김재두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