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어떤 사람은 떠난 뒤에야 더 또렷해진다. 지난 2024년 12월 22일 세상을 떠난 1세대 정치평론가 유창선 박사가 그렇다. 그가 생전 마무리하던 원고를 엮은 유고작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가 도서출판 새빛에서 출간됐다.
이번 책은 정치 현안을 정면으로 다룬 평론집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로부터 한 발 물러난 이후, 병상과 재활의 시간을 통과하며 다시 삶을 배워야 했던 한 인간의 기록에 가깝다. 오랜 시간 방송과 신문, 잡지, 인터넷을 통해 정치평론을 이어온 그가 생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길어 올린 사유의 결실이다.
전환점은 2019년 뇌종양 수술이었다. 생사를 가르는 수술과 8개월에 걸친 병상 생활은 그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토론 스튜디오를 오가던 평론가는 재활병원 복도를 천천히 걷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그는 이 시간을 "길었던 투병과 재활의 터널"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걷는 기쁨을 되찾은 그는 제주 올레길을 걸었고, 러닝 모임에 참여해 5㎞ 마라톤을 완주했다. 미술 전시장을 찾고, 클래식 공연과 대중음악 콘서트를 관람하며 예술을 통해 상처를 복구하는 법을 배웠다. 정치평론가에서 문화예술 칼럼니스트로의 확장은 도피가 아니라 삶의 영역을 넓히는 선택이었다.
책 제목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그가 지나온 시간을 압축한다. 단순하지만 단단한 문장이다. 병의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태도였고, 좌절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걸음이라는 메시지가 책 전반을 관통한다.
가족의 기록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부인 김경숙 씨는 "나에게 남편은 이미 존경스러운 어른"이라고 적었다. 병상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애썼던 사람. 공적 영역에서의 평론이 치열한 논쟁의 언어였다면, 일상에서의 그는 더욱 조용하고 단단한 삶의 태도를 지녔다는 회고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유창선 박사는 국회 보좌관을 거쳐 1990년대부터 정치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정치의 재발견' 등으로 진영 논리를 비판하며 '원칙의 언어'를 강조해 왔다. 투병 이후에는 '오십에 처음 만나는 예술', '나를 찾는 시간' 등 문화와 삶을 주제로 한 책을 잇달아 펴냈다.
출판사 측은 "원고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며 "정치평론가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살아온 이야기와 경험에 여러 메시지와 의미가 담겨 있어 책으로 출간하게 됐다"고 밝혔다.
빠르고 거친 언어가 일상을 흔드는 시대다. 한 문장이 진영을 가르고, 한 장면이 분노를 증폭시킨다. 그 속에서 유창선의 문장은 느리지만 단단하다. 말은 칼이 아니라 다리여야 한다는 그의 믿음, 그리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태도는 이제 독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한 평론가의 마지막 기록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질문이다. 비록 유창선 박사는 떠났지만 책을 통해 '우리는 어떤 언어를 선택하고 있는가, 그리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 청년일보=조성현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