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석구석] ⑰ 서초구, '상서로운 풀' 자라던 땅…'법(法)'과 '부(富)'의 숲

등록 2026.02.15 10:25:13 수정 2026.02.15 10:25:13
김재두 기자 suptrx@youthdaily.co.kr

대한민국 사법 1번지의 엄숙함과 양재 R&D의 역동성... 권력과 기술의 공존
'아크로' 요새 넘어 '경부선 지하화'로... 단절된 도시 잇는 서초의 실험

 

<서울 구석구석: 공간에 새겨진 도시 변화의 서사> 시리즈는 서울의 역동적인 변화를 '공간의 재구성'이라는 프리즘으로 분석한다. 과거의 유산과 현재의 삶,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도시의 전략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 그 현장의 모습과 변화를 입체적으로 다룬다. 도시의 물리적 변화가 개인의 일상, 경제, 문화, 심지어 정치적 지형까지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살펴봄으로써,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다층적인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의미가 있다. 그 17번째 장소로, 화훼 농가 비닐하우스 촌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부촌이자 법조·혁신 거점으로 천지개벽한 서초구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 청년일보 】 서초(瑞草). '서리풀' 또는 '상서로운 풀'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본래 쌀과 채소, 꽃을 키우던 비옥한 농토였음을 말해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남 개발의 변방이었던 이곳은 배 밭과 비닐하우스가 즐비한, 서울이라기엔 너무나 목가적인 풍경을 간직한 곳이었다.

 

하지만 1988년 강남구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 서초구의 운명은 급변했다. 강남의 끝자락이었던 이 도시는 이제 '꽃' 대신 '법'과 '부', 그리고 '혁신'이 자라나는 복합 도시로 진화했다. 우면산 자락을 깎아 만든 터에는 서슬 퍼런 사법 기관들이 들어섰고, 한강 변 모래톱 위에는 최고급 아파트들이, 양재천 주변에는 첨단 연구소들이 들어서며 대한민국 권력과 기술의 심장부로 거듭났다.

 

 

◆ 죄와 벌의 무게...서초동 '법조타운'의 공기

서초구의 이미지를 가장 먼저 규정하는 것은 서초동 '법조타운'이다. 지하철 2호선 서초역 사거리를 중심으로 대법원과 대검찰청, 서울중앙지검이 거대한 삼각형을 그리며 마주 보고 있다.

 

이곳의 공기는 서울의 다른 곳보다 무겁고 엄숙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법조인들과 서류 가방을 든 의뢰인들이 바쁘게 오가는 거리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과거 비닐하우스에서 꽃을 가꾸던 농부들의 땅은 이제 대한민국 사회의 가장 첨예한 갈등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심판의 땅'이 되었다. 법원 앞 거리에서 매일같이 열리는 집회와 시위의 소음은 이곳이 권력의 정점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배경음악이다.

 

법조타운이 권력의 상징이라면, 반포동 한강 변은 대한민국 '주거의 기준'을 상징한다. 1970년대 강남 개발 초기에 지어진 저층 주공아파트 단지들은 201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재건축 붐을 타고 '하이엔드' 주거지로 탈바꿈했다.

 

2016년 입주후 약 2년뒤에 평당 1억원 시대를 연 '아크로 리버파크'와 2023년 들어선 '래미안 원베일리' 등은 단순한 아파트를 넘어 한강 변의 거대한 성벽이 되었다.

 

최고의 학군과 교통, 한강 공원이라는 독보적인 인프라를 갖춘 이곳은 서울 시민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워너비' 주거지이자, 동시에 넘볼 수 없는 높은 진입 장벽을 가진 요새이기도 하다.

 

◆ 소비 도시 너머 '생산 도시'로...양재·우면 R&D 혁신

서초구를 단순히 법조와 주거 중심의 소비 도시로만 보는 것은 반쪽짜리 시선이다.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양재동과 우면동 일대에서 태동하는 '생산 도시'의 활기를 만날 수 있다.

 

우면산 자락에 자리 잡은 삼성전자 서울R&D캠퍼스와 LG전자 서초R&D캠퍼스, 그리고 양재동 일대의 'AI 혁신 지구'는 서초구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지는 곳이다.

 

판교 테크노밸리에 버금가는 인재들이 모여드는 이곳은, 서초구가 '권력의 도시'를 넘어 '기술의 도시'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화훼 농가들이 모여 있던 양재동 꽃시장은 이제 첨단 기술과 스타트업이 피어나는 혁신의 토양이 되고 있다.

 

숨 막히는 빌딩 숲 사이에서 서초구가 여유를 잃지 않는 건 풍부한 녹지 덕분이다. '갓' 모양의 예술의전당과 우면산, 그리고 도심을 가로지르는 양재천은 서초구민들의 허파 역할을 한다.

 

특히 양재천을 따라 조성된 메타세쿼이아 길과 시민의숲은 딱딱한 격자무늬 도시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주말이면 법전과 연구 데이터를 내려놓은 시민들이 이곳에서 문화를 향유하고 자연과 호흡한다. 서초구(瑞草)라는 이름처럼, 이곳은 여전히 '푸른 풀'이 도시를 지탱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양재천 인근 거주자 A씨는 "강남과 판교 접근성이 모두 뛰어난 교통의 요지"라며 "양재천변 상권이 발달해 있고, 유동 인구가 많아 늦은 시간에도 안심하고 다닐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 "주거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편리한 생활 인프라 덕분에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 '경부선'이 갈라놓은 도시, 지하화로 다시 잇다

서초구를 남북으로 관통하며 도시를 단절시켰던 경부고속도로는 2026년 현재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했다. 서울시가 양재~올림픽대로 구간의 지하화 사업에 속도를 내면서, 상습 정체와 단절의 상징이었던 도로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현재 전략환경영향평가와 적격성 조사가 동시에 진행되는 등 행정 절차가 진행 중이며, 시는 2029년 착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대규모 토목 공사가 완료되면, 물리적으로 나뉘어 있던 서초구의 생활권이 연결되고 상부에는 녹지 및 복합 공간이 조성될 전망이다.

 

법조와 주거, 예술, 그리고 양재의 R&D 혁신까지. 서초구가 가진 다양한 도시 기능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상서로운 풀'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미래 가치가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 청년일보=김재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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