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석구석: 공간에 새겨진 도시 변화의 서사> 시리즈는 서울의 역동적인 변화를 '공간의 재구성'이라는 프리즘으로 분석한다. 과거의 유산과 현재의 삶,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도시의 전략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 그 현장의 모습과 변화를 입체적으로 다룬다. 도시의 물리적 변화가 개인의 일상, 경제, 문화, 심지어 정치적 지형까지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살펴봄으로써,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다층적인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의미가 있다. 그 14번째 장소로, 화려했던 청년 문화의 과거를 뒤로하고 새로운 도시 정체성을 찾아가는 서대문구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 청년일보 】 서대문구는 이름 그대로 조선 시대 한양 도성의 서쪽 관문인 '돈의문(서대문)' 밖에 위치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리적으로는 안산(鞍山)과 인왕산이 포근히 감싸고, 역사적으로는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가 말해주듯 근현대사의 격랑이 서린 땅이다.
하지만 대중에게 각인된 서대문구의 이미지는 단연 '청춘'과 '지성'이다.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마포구 인접), 홍익대(마포구) 등 주요 대학이 밀집한 이곳은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청년 문화의 발상지이자 유행을 선도하는 '젊음의 해방구'였다.
그러나 2026년 1월, 서대문구의 풍경은 사뭇 달라졌다. 영원할 것 같았던 '신촌·이대 상권'의 영광은 홍대와 성수동 등 신흥 상권에 밀려 빛이 바랬다. 반면, 권력의 상징이었던 연희동은 독자적인 '로컬 브랜드'로 부상하며 서대문구의 새로운 문화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 '패션 1번지'의 몰락과 부활...신촌·이대의 과도기
2000년대 초반까지 '패션의 메카'로 불리던 이화여대 앞 거리는 젠트리피케이션과 온라인 쇼핑의 성장이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높은 임대료를 견디지 못한 상인들이 떠나면서 한때 거리를 메웠던 옷가게와 화장품 로드숍은 상당수 자취를 감췄다.
신촌 역시 마찬가지다. '약속 장소의 대명사'였던 신촌역 인근은 대형 프랜차이즈와 공실이 혼재된 모습이다. 유행을 선도하던 독창적인 카페와 술집들이 홍대와 연남동으로 이동하면서, 신촌은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진통을 겪고 있다.
다만 긍정적인 신호는 '대학'에서 나온다. 서대문구와 대학들이 협력한 '캠퍼스 타운' 사업이 자리를 잡으며, 상업 시설이 떠난 자리를 청년 창업 공간과 문화 예술 거점이 채우기 시작했다. 유학생들의 유입으로 거리는 한층 글로벌해졌고, 소비 중심의 유흥가에서 '주거와 창업, 문화'가 어우러진 대학 도시로 체질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는 평가다.
◆ "대통령 사저 옆 힙한 카페"...연희동의 기묘한 동거
신촌이 쇠락과 재편의 시간을 보내는 사이, 바로 옆 연희동은 '가장 힙한 동네'로 떠올랐다. 흥미로운 점은 연희동의 부상 요인이 역설적으로 '불편한 교통'과 '오래된 주택'에 있다는 것이다.
연희동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저가 위치한 곳으로, 과거에는 경비가 삼엄한 '권력의 동네'이자 부촌의 상징이었다. 인근에는 전직 대통령들이 즐겨 찾았다는 유명 칼국수 집이 여전히 성업 중이라, 주말이면 옛 향수를 찾는 어르신들과 맛집을 찾아온 젊은이들이 뒤섞여 긴 줄을 서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지하철역이 없어 접근성이 떨어지는 탓에 연희동은 대규모 고층 개발의 광풍에서 비껴나 있었다. 덕분에 1970~80년대 지어진 붉은 벽돌의 대저택과 미로 같은 골목길이 원형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이 아날로그적 공간에 개성 있는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모여들며, 연희동은 서울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여유로운 '슬로우 라이프'의 성지가 되었다.
연희동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또 다른 한 축은 '작은 차이나타운'이다. 한성화교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화교 커뮤니티는 이 지역을 '미식의 거리'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인천처럼 화려한 장식의 관광지는 아니지만, 수십 년 내공을 지닌 중식당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어 진짜 미식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재개발' 기다리는 홍제동과 '치유의 숲' 안산
서대문구의 또 다른 축인 홍제동과 홍은동 일대는 주거 환경 개선이 시급한 과제다. 1970년대 지어진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인 '유진상가'와 낡은 아파트들은 서대문구의 오래된 역사를 보여주는 유산이자, 동시에 개발을 기다리는 주민들의 열망이 응축된 현장이다.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이 유진상가 일대를 직접 방문해 현장을 점검하면서 이 지역의 변화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노후화된 상가와 하천 부지를 연계한 입체적인 개발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오랫동안 정체되었던 홍제동 일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홍제역 유진상가 인근에 사는 40년 째 거주중인 A씨는 "유진상가 자체가 정말 너무 오래됐다. 이 동네에서는 저렇게 떡하니 가장 중간에 있는데 어떻게든 개발이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며 "최근 시장님이 다녀가면서 개발 이야기가 다시 나오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동네가 좀 훤해졌으면 하는 게 주민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라고 말했다.
도심 속 허파 역할을 하는 '안산 자락길'은 서대문구의 자랑이다. 전국 최초의 순환형 무장애 숲길인 이곳은 휠체어나 유모차도 쉽게 오를 수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서울의 대표적인 치유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서대문구는 지금 거대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화려했던 신촌의 상권이 저물어가는 것은 아쉽지만, 이는 소비 중심의 획일적인 대학가 문화가 창의적인 '캠퍼스 타운'으로 진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연희동의 성공은 '빠름'과 '개발'만이 정답이 아님을 증명한다. 권력의 역사와 화교 문화가 스민 낡은 골목에 새로운 감각을 입혀 되살려낸 서대문구의 실험. 과거의 영광을 넘어 가장 서울다운 '로컬의 미래'를 보여주는 서대문구의 내일이 기대된다.
【 청년일보=김재두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