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면·짜파게티·너구리·새우깡 등 스테디셀러 제품으로 반세기 넘게 국민 입맛을 책임지고 있는 농심이 내년 60주년을 맞는다. 1965년 설립 이후 올해 59돌을 맞은 농심의 발자취와 창업주 고(故)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의 경영 철학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上) 롯데공업에서 농심까지…도전의 역사와 '희로애락'
(中) '작명왕' 신춘호 회장, 제품 성공의 비결은 '차별화'
(下) "이제는 해외로"…글로벌 식문화 창조기업으로 도약
【 청년일보 】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기업을 운영하겠다"
고(故)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은 1978년 롯데공업에서 농심으로 사명을 바꿀 때 이렇게 다짐했다고 한다.
농심은 롯데공업에서 출발했다. 창업주 신춘호 회장은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동생이다. 1960년대 일본에서 라면이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자 신춘호 회장은 라면 사업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다.
이에 1965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롯데공업을 설립하고 같은해 자체 기술로 만든 롯데라면을 통해 라면 사업에 첫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이미 국내에서 다양한 라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아직 라면이 국내에서 생소해 롯데라면의 성적은 지지부진했다.
특히 1960년대 정부의 혼분식(混粉食) 장려운동(쌀밥 대신 잡곡(雜穀)을 섞어먹는 혼식)으로 라면시장에 참여하는 기업들이 증가하며 경쟁사가 늘어난 것도 한몫했다.
당시 풍년라면(풍년식품), 닭표라면(신한제분), 해표라면(동방유량), 아리랑라면(풍국제면), 해피라면, 스타라면, 롯데라면(농심) 등 8개 제품이 시장에 쏟아져 나와 경쟁을 벌였다.
신춘호 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1970년 외식 메뉴로 선풍적 인기를 끌던 짜장면을 라면으로 만든 롯데짜장을 선보인다. 그러나 또 다시 경쟁사들이 짜장라면을 내놓으며 경쟁이 심화됐고 회사는 경영난을 겪는다.
그는 이처럼 5년간의 뼈아픈 성적으로 한가지를 깨닫게 된다. 소비자들은 회사명보다 제품명을 먼저 떠올리니 차별화를 통해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제품 브랜드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다짐했다.
회사는 또 다시 신제품 개발 착수에 들어갔다. 당시 대부분의 라면은 닭 육수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닭고기보다 소고기를 좋아하는데 소고기국의 깊은 맛을 라면으로 구현해보자'는 취지에서 신제품 연구를 시작됐다.
1970년 소고기라면이 출시됐고 '라면은 소고기 국물'이라는 맛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실제로 소고기 라면 출시 이후 농심의 시장점유율은 10%대에서 20%대로 급증하며 사업은 새 변곡점을 맞이했다.
라면 사업이 승승장구하게 되면서 신춘호 회장은 또 다시 신사업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라면 후발주자로서 아직 성적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일본에서 새우과자를 먹게 됐고 '이거다'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새우과자는 신춘호 회장의 입맛에 맞지 않았고 한국식으로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새우과자를 만들기 위한 연구 기간만 1년이 걸렸다. 이를 위해 4.5t 트럭 80대 분량의 밀가루가 사용됐다.
그는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새우스낵, 새우뻥 등 여러 이름을 고민했다. 그러던 와중 신춘호 회장의 막내딸이 아리랑 노래를 아리깡으로 부르는 것을 듣게 됐고, 신제품의 이름은 '새우깡'이 됐다. '국민 과자' 새우깡의 시작이었다.
새우깡은 1971년 출시와 함께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새우깡 출시 3개월 만에 매출이 3.5배나 늘기도 했다. 이는 라면업계 후발주자로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던 농심을 한차례 성장시키는 불씨가 됐다.
이때부터 회사 성장에 가속도가 붙어, 1975년 기준으로 설립 시 500만원이던 자본금이 5억2천500만원으로, 매출은 1966년 약 2억원에서 200억원으로 급증했다.
◆ 롯데공업에서 농심으로…1980년대 라면 시장 호황으로 업계 1위 '등극'
롯데공업은 라면과 스낵 사업으로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형인 신격호 회장과의 갈등이 격화되며 사명에서 롯데를 제외하고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롯데공업은 1978년 농심으로 사명을 바꿨다. 농심이라는 말은 '이농심행 무불성사(以農心行 無不成事)'의 줄임말로 '성실과 정직으로 행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농부의 마음을 담았다.
본격적으로 농심이 탄생한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자 라면 시장은 황금기를 맞게 된다. 농심은 이미 다양한 라인업의 라면을 보유 중이었으나 고품질의 라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스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1982년 안성에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스프 전문공장을 세웠다. 당시만 해도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결국 원가 절감 및 고품질 제품 확보로 이어졌다.
결국 투자는 결실을 맺어 1982년 너구리와 육개장사발면을 시작으로 안성탕면(1983), 짜파게티(1984), 신라면(1986) 등 스테디셀러 제품들을 출시했다.
실제로 짜파게티 출시 이후 1985년 3월 농심은 라면시장에서 1위 자리에 올라선다. 역전 당시 라면시장 점유율은 농심 40.4%, 삼양식품 39.6%, 한국야쿠르트 13.5%, 청보 5.9% 등을 기록했다.
이듬해인 1986년 농심은 한국의 매운 맛을 대표하는 '신라면'을 내놓으며 2위와의 간격을 더욱 넓혔고, 1988년 '사리곰탕면'을 출시하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판매가 이뤄지는 히트작 라인업을 완성했다. 1988년 농심의 시장 점유율은 50.6%였다.
◆ IMF 시절 국민 위로한 '신라면'…유통업계 압박에도 제품 경쟁력 키워
농심은 아이러니하게도 1997년말 IMF 외환위기 시절 또 다시 크게 성장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음식인 라면 판매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1998년 매출액은 1조959억원으로 매출 1조원 시대를 열었다. 이는 1973년 100억원, 1981년 1천억원 이후 17년 만의 뜻 깊은 성과였다.
하지만 위기는 IMF 이후 찾아왔다. 대형마트 등 유통채널이 성장하며 '라면왕국' 농심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유통사와 제조사간의 연합작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제품 기획과 디자인은 유통업체가, 생산은 라면업체들이 맡는 PB상품(자체 개발 상품)을 출시하는 방식으로 저가 라면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에 롯데그룹이 37년만에 '롯데라면'을 내놓는 등 유통업계가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가해왔다.
그럼에도 농심은 제품 경쟁력을 강화하며 위기를 헤쳐 나갔다. 이미 국내에서는 신라면의 입지가 탄탄했고 2000년 이후로는 해외 수출로 시장을 다변화했다.
이 결과 농심은 2003년 라면업계 최초로 연 매출 1조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이후 농심은 2022년 창사 56년만에 공시대상 기업집단에 들었고 올해 기준 80위를 기록했다.
아울러 농심은 2022년 연간 매출액 '3조 클럽'에 입성했다. 지난해에는 매출액 3조4천106억원, 영업이익 2천121억원, 당기순이익 1천715억원을 기록해 전년 동기 대비 9%, 89.04%, 47.84% 증가했다.
【 청년일보=신현숙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