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 '오뚜기' 식품 여정(中)] "국내 식품사 한 획"…함태호 창업주, 부잣집 아들에서 군인·기업인으로 변신

등록 2024.10.14 08:00:00 수정 2024.10.14 08:00:08
신현숙 기자 shs@youthdaily.co.kr

함태호 명예회장, 고교 재학 중 6.25 전쟁 발발…집안 만류에도 자원 입대
7년간 군대서 근무…이후 '조흥화학' 입사해 선친 밑에서 식품사업 꿈 키워
첫 제품 '카레' 낙점…이국 음식에도 적극적 영업활동으로 국민 제품 '등극'
카레 성공에도 도전정신 이어져…글로벌 기업과 10년간 경쟁서 최종 승리
사회공헌사업 활발…선천성 심장병 환아 1992년부터 꾸준히 후원 이어와

 

케첩·마요네즈·식초 등 국민 스테디셀러를 보유한 오뚜기가 올해 55주년을 맞았다. 국민 카레 신화를 쓴 고(故) 함태호 오뚜기 명예회장의 경영철학부터 현재까지 오뚜기의 역사에 대해 짚어본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上) 국민 식량난 해소 기여한 '풍림상사'…'갓뚜기'는 오히려 '독이 든 성배'
(中) "국내 식품사 한 획"…함태호 창업주, 부잣집 아들에서 군인·기업인으로 변신
(下) K-라면 키플레이어 '시동'…내수 위주에서 탈피 글로벌 공략 '풀어야 할 숙제'

 

【 청년일보 】 "군대에 입대하겠습니다"


아들의 청천벽력 같은 발언에 함형준씨는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의 나이는 고작 18살이었고 당시 1950년 한국전쟁이 막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故) 함태호 오뚜기 명예회장은 아버지로부터 호되게 혼이 났다고 한다. 함태호 명예회장은 1930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의 장남이었던 그는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재학 중에 6.25 전쟁이 터졌다.


모두 피난을 가려고 하는 시기에 되려 자원 입대를 하겠다는 발언에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나 부유한 자제들 일수록 군대 입대 대신 피난을 가려고 노력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안위보다 나라사랑이 깊었던 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실제로 함태호 명예회장은 한국전쟁 임시군사교육학교인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소위로 임관해 1957년까지 근무했다.


군인으로 국가에 기여하겠다는 충심으로 전선에서 사선을 넘나들었던 함태호 명예회장은 전쟁이 끝나고 30대가 가까워진다. 


그는 무기를 들고 나라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헐벗은 국가경제와 굶주린 국민들을 위해 식품산업을 일으키는 것도 절실하다고 느꼈다.

 


소령으로 군을 전역한 함태호 명예회장은 1959년 아버지가 운영하던 조흥화학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10년 동안 함태호 명예회장은 선친 밑에서 경영수업을 받으며 기획에서 영업, 재무 등 두루 경험을 쌓았다.


아울러 경영인으로서의 소양을 쌓고자 홍익대학교 상학과를 나와 1968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혹독하게 쌓아온 이 시기의 경험이 경영자 함태호를 만든 힘이었다는 평가다.


당시 조흥화학은 페인트, 세제 원료 등을 만드는 기업이었다. 이 가운데 식품 첨가물도 만들게 됐는데, 함태호 명예회장은 입사 10년동안 식품사업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가업을 잇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길을 홀로 개척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함태호 명예회장이 고심해 선택한 분야는 식품사업이었다. 그는 조흥화학에서 인공 감미료와 식품첨가물을 제조한 경험이 있어 식품사업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직접 식품사업에 뛰어들어 국민들의 식생활 개선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도 컸다. 


새로운 결심이 굳어지자 함태호 명예회장은 선친에게 포부를 밝혔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홀로서기 첫발을 내딛었다.


1969년 함태호 명예회장은 마흔에 접어들었고 서울 영등포 문래동에 작은 공장을 마련했다. 


다만 그는 첫 제품으로 어떤 것을 내 놓을지 고민에 빠졌다. 그 당시 일본 업체와 기술제휴에 성공해 국내 시장에서는 라면이 나오고 있었는데, 이미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어 색다른 제품이 필요하다는 시각을 가졌다고 한다. 


결심을 굳힌 함태호 명예회장은 바로 제품 출시에 돌입했다. 준비 기간이 길었고 과정이 탄탄했기에 진행은 일사천리였고, 단 몇 개월의 준비 끝에 1969년 5월 5일 첫 제품이 시장에 나왔다. '오뚜기 카레'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다만 당시 카레는 제품 자체가 생소했고 특유의 향과 색으로 국민들에게 친근한 음식은 아니었다.


이에 함태호 명예회장은 적극적으로 영업과 홍보, 마케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함태호 명예회장과 전 직원들은 카레 박스를 들고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며 영업을 했다. 


아울러 그는 영업사원이 거래처를 직접 방문해 제품에 대한 소개와 진열을 통해 점주들과 유대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소비자와 직접 대면을 통해 소비자들이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는 루트세일(Route Sale)을 국내 최초로 실시했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시식판매 및 판매 여사원 제도를 도입, 당시로서는 혁신적이고 선진적인 마케팅을 실행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움직이는 차량광고, 제품박스를 통한 광고 등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 결과 현재 오뚜기 카레는 국민 제품으로 등극했다. 현재 국내 분말카레 시장은 약 730억원 규모로 추정되며, 오뚜기의 점유율은 무려 85%에 이른다. 


시장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3분 카레'를 포함한 3분 요리류의 점유율 역시 77.4%(2022년말 수량 기준)로 선두를 유지 중이다. 함태호 명예회장의 선견지명이 통한 것이다.


이후로도 오뚜기는 상큼한 지중해산 토마토의 풍미를 더한 카레, 100% 비건 재료만을 사용한 카레, 세계 각지의 맛을 살린 이색 카레 등으로 제품군을 확대하며 소비자 선택 폭을 넓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 카레 성공에도 도전 정신 이어져…글로벌 기업과 경쟁에서 승리


카레의 성공에도 함태호 명예회장의 도전 정신은 멈추지 않았다. 1971년 토마토 케챂, 1972년 마요네스를 국내 처음으로 생산, 판매했다. 

 

 

1978년에는 국내 최초로 2단계 고산도 식초 발효공법에 의한 2배 식초, 3배 식초를 개발해 출시했다. 특히 사과식초, 포도식초, 현미식초 등 식초의 다양화를 처음으로 이뤘다.

 

1980년대에는 글로벌 다국적기업인 미국의 CPC인터내셔널과 하인즈사의 국내시장 진출로 10여년간에 걸친 경쟁에서 우리 시장을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이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성과를 거뒀다.


1980년대 후반에는 청보식품을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라면사업에 진출하게 된다. 당시 진라면, 스낵면 등이 성공하며 5년만에 업계 3위에 등극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로도 참치, 즉석밥 시장으로 지평을 넓히며 식품기업으로서의 입지를 확대해 나갔다. 


이런 호실적은 함태호 명예회장의 맛과 품질에 대한 확고한 경영철학으로부터 시작됐다. 실제로 그는 매주 금요 시식에 직접 참여하여 평가를 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등 맛과 품질에 대해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직접 챙겼다고 한다. 


◆ 사회공헌사업도 활발히…선천성 심장병 환아 30년 이상 후원


함태호 명예회장의 삶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심장병 어린이 후원사업이다. 그는 일찍부터 기업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기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함태호 명예회장은 1992년 선천성 심장병을 앓는 어린이들이 10세 이전에 수술을 받지 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한국심장재단을 통해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후원을 시작했다. 


1992년 매월 5명으로 시작한 후원은 점차 그 인원을 늘려 현재는 매월 22명을 후원하고 있다. 올 8월까지 6천255명의 어린이들에게 새 생명을 선사했다.


함태호 명예회장은 오뚜기의 사랑으로 새 생명을 얻은 어린이와 가족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 


실제로 오뚜기는 완치된 어린이와 가족들을 매년 스위트홈 오뚜기 가족요리 페스티벌, 공장견학 등 회사의 다양한 행사에 초청하고 있다.

 

 

함태호 명예회장은 어린이 후원사업 외에도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공원활동에도 앞장섰다.


회사는 2012년 6월부터 장애인학교와 장애인 재활센터를 운영하는 밀알복지재단의 '굿윌스토어'에 단순한 자선이 아닌 장애인의 자립을 위한 지원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선물세트조립 임가공위탁, 판매물품지원, 물품기증캠페인, 자원봉사활동 참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함태호 명예회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1996년 12월에 사재를 출연해 오뚜기함태호재단을 설립했다. 


오뚜기함태호재단은 1997년 5개 대학 14명의 장학금 지원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1천253명에게 약 85억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2009년부터 매년 오뚜기함태호학술상을 제정, 연2회 한국식품과학회와 한국식품영양과학회를 통해 식품산업 발전과 인류 식생활 향상에 기여한 공로가 큰 식품관련 교수와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오뚜기함태호학술상을 시상해 오고 있으며 지난해까지 총 28명이 수상했다.
 

이외에도 생활용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결식아동, 홀로 사는 어르신, 장애인 등 우리 사회 저소득 계층에 식품을 지원해 주기 위해 1999년부터 전국 11개 광역푸드뱅크를 통해 물품을 후원하고 있다. 


2012년 8월에는 오뚜기 봉사단을 출범시켜 나눔과 봉사를 통해 사회적 기여를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함태호 명예회장은 식품산업을 선도하는 선구자로서 지난 2005년 해외 신시장 개척 공로를 인정받아 석탑산업훈장을 수상했으며, 2011년에는 국민 식생활 개선을 통해 국가사회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함태호 명예회장은 2010년 회장직을 아들 함영준 회장에게 넘기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2016년 별세했다.


오뚜기 관계자는 "오뚜기는 지난 55년간 품질 제일주의를 실천하고 있으며, 인류의 식생활 향상과 식품을 통한 건강과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또 미래사회의 주인공인 어린이를 위한 나눔 철학, 장애인의 경제적 자립기반 제공, 나눔과 봉사를 통한 희망 전파 등을 통해 사회에 필요한 기업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청년일보=신현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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