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대부분 나라의 법원 앞에는 천으로 두 눈을 가리고, 양손에 천칭 저울과 칼을 든 여신상이 서있다. 바로 정의의 여신 디케(Dike)다. 디케가 두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정의, 즉 법을 통해 사안을 판단해야 한다는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민주국가는 국가 권력을 입법ㆍ사법ㆍ행정으로 나눠 상호간 견제와 균형을 유지시킨다. 이 가운데 선출직이 아니면서 권한과 임기를 보장받는 것이 사법부다. 권력ㆍ금력ㆍ이념을 배제하는 것은 물론 포퓰리즘의 덫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다. 만약 법관마저 선거로 뽑으면 특정 진영의 선거 패배는 곧 멸망을 의미한다. 목숨을 건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사법부에 정치적 중립성을 요구하는 이유다.
지난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의 출범 직후 진보 성향의 한 소장 판사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이 논란을 낳았다. '재판은 곧 정치'라며 법관의 정치적 성향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법관의 독립'이라는 게 요지다. 당시 논란의 주인공은 국제인권법연구회(이하 인권법연구회) 소속의 오현석 판사다.
오 판사는 '재판과 정치, 법관 독립'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의미에서 재판은 곧 정치라고 말해도 좋다"며 "판사들마다 정치적 성향이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이제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헌법의 개념에 대해서도 "남의 해석일 뿐인 대법원 해석, 통념, 여론 등을 양심에 따른 판단 없이 추종하거나 복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명령”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법관의 정치적·이념적 신념에 따른 판결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사법부에 법과 양심에 따른 판결을 주문하고 있다. 그 어떤 정치적 압력이나 법관 개인의 정치적 지향을 배제하고, 오직 법을 사법 심판의 잣대로 삼아 누구든 승복할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법관 개인의 정치적ㆍ이념적 신념을 재판에 투영하지 말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권 출범 직후인 2017년 8월 김명수 춘천지법원장을 대법원장으로 지명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연수원 15기다.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이 사법연수원 2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무려 13기수나 계단을 건너 뛴 인사다. 이 때부터 사법부는 정권과 '코드'가 맞는 인물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정치에 대한 사법 종속, 즉 사법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인권법연구회의 1, 2대 회장을 지냈다. 지난 2011년 8월 설립된 인권법연구회의 창립 멤버는 31명인데, 이 가운데 32%인 10명이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다. 그리고 인권법연구회의 핵심 회원들은 2015년 9월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을 결성한다. 국내 사법 체계를 주로 연구하는 모임으로 우리법연구회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족보(族譜)를 정리해 보면 우리법연구회 → 인권법연구회 → 인사모인 셈이다. 지난 1988년 출범한 우리법연구회는 사법부 조직 내 민주화 운동세력이 모체라는 말이 끊임없이 나돈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인권법연구회 소속 법관들이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재판과 사법행정 부서에 집중 배치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판과 사법행정은 대법원의 양대(兩大) 핵심 기능이다.
우선 대법원 상고심(3심) 사건의 검토 보고서를 만들어 대법관에게 올리는 대법원 재판연구관 97명 중 34%인 33명이 인권법연구회 소속이다. 인권법연구회 회원은 460여 명으로 전체 법관 3214명의 14%인데, 대법원 재판연구관 중 인권법연구회 소속 법관은 2.5배에 달하는 셈이다.
인사와 예산 등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 법관 12명 중 5명도 인권법연구회 소속이다. 전체의 42%에 달한다. 비슷한 기능을 하는 대법원 산하 사법행정자문위원회 위원 10명 중 4명(40%)도 인권법연구회 소속이다. 특히 법원의 '허리'에 해당하는 전국 지원장 41명 가운데 10명(24%) 역시 이 연구회 소속으로 나타났다.
법원장 추천제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2019년 도입한 것이다. 지방법원 소속 법관들이 해당 법원장 후보를 직접 추천토록 한 것이다. 문제는 법원장 추천 과정에서 법관 성향에 따른 편가르기가 발생, 사법부의 정치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일선 법관과 자주 접촉하는 지원장은 법원장 후보 1순위로 꼽히는데, 머지 않아 법원장도 인권법연구회 소속 법관들의 약진이 두드러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직급별 법관 모임인 전국법관대표회의 운영진도 매년 50~64%가 인권법연구회 소속 법관으로 채워지고 있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2017년부터 김명수 대법원장이 깃발을 든 '사법 적폐 청산'을 적극 지원하면서 '김명수 호위 회의'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전국법관대표회의마저 장악한 인권법연구회가 김명수 대법원장을 지키기 위해 사법 독립은 내팽개치는 기득권 세력이 됐다는 것이다.
특정 세력의 득세, 즉 조직 장악은 공정성이 생명인 사법부에 치명적이다. 김명수 체제의 대법원을 두고 과거 군(軍) 요직을 독식한 '하나회'를 방불케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심각한 것은 특정 세력의 정치적ㆍ이념적 신념이 재판에 반영되는 경우다. 이는 '같은 재판, 다른 선고'가 잇따라 혼란을 낳는 것은 물론 정치적 편향성에 따른 국가적 갈등의 진원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법부에 특정 세력이 '똬리'를 틀고, 오직 법과 증거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재판에 특정한 정치적ㆍ이념적 신념이 개입하는 광경은 얼핏 이탈리아 공산당 창설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론'을 연상시킨다. 특정 분야의 헤게모니 장악을 통해 조직을 접수한 후 지배 이데올로기를 빼앗아 와야 한다는 그람시의 말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것은 지나친 기우(杞憂) 탓일까.
【 청년일보=정구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