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1일(현지시간) 첫 대면 정상회담에서 크랩 케이크로 오찬(午餐)을 함께 했다.
크랩 케이크는 미국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체서피크만에서 주로 생산되는 꽃게살을 이용하는 어묵과 비슷한 음식이다. 개척시대 체서피크만의 원주민들이 만들어 먹던 음식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대서양을 지나 북미 대륙에 처음 정착한 유럽인들이 처음 만든 음식이라는 설도 있다.
크랩 케이크는 꽃게를 잡기가 어렵고 위험해 1800년대 이전까지 흔한 음식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후 어업이 번성하면서 꽃게살을 구하기 쉬워져 동서부 해안지역에서 인기 있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냉장보관이 용이해지기 이전까지는 해안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였다는 것이다.
정만호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해산물을 좋아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식성을 고려해 미국 측이 크랩 케이크를 메인 메뉴로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회담 시간은 37분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는 곧장 4월 16일 개최된 바이든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간 정상회담과 비교됐다. 당시 바이든 대통령과 스가 총리는 햄버거를 앞에 두고 2m 정도의 긴 테이블 양 끝에 각각 앉아 20분간 오찬을 했다. 스가 총리는 햄버거에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정만호 수석 브리핑의 요점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미국, 즉 바이든 대통령의 '성의'(誠意)다. 정성을 다했다는 의미인데, 이를 반증할 소품으로 크랩 케이크와 정상회담 시간이 등장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양국 정상이 '노마스크'로 만난 것도 부각시켰다. 바이든 대통령이 마스크 두 장을 겹쳐 쓰고 스가 총리를 맞이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시지를 통해 "코로나 이후 최초의 해외순방이었고 대면 회담인데다 최초의 노마스크 회담이어서 더욱 기분이 좋았다"고 밝혔다. 성의있게 대해줘 대접을 받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사족(蛇足) 같지만 미국은 지난 13일부터 백신 접종자는 실내외 대부분의 경우에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새 지침을 내놓은 바 있다. 한미 정상 모두 백신 접종자다. 그런 만큼 스가 총리의 겹마스크와 문재인 대통령의 노마스크는 성의 측면에서의 비교 대상은 아닌 셈이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4일 한미 정상회담과 관련, "한미 관계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전면적인 변화의 계기, 즉 전략적 변곡점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안보와 경제 등 전(全) 분야에서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는 것이다. 반면 국민의힘 등 야권은 한 번의 정상회담으로 지난 4년간 삐걱거렸던 한미동맹이 한꺼번에 정상화될 수는 없다며 결국 문제는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액면만 놓고 보면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물은 긍정적이다. 반도체와 배터리 등 핵심 제조업의 공급망 협력 강화, 한미 글로벌 백신 파트너십 구축, 한국군 장병 55만명에 대한 백신 제공, 한미 미사일 지침 42년 만에 폐지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해외 원전시장에 공동 진출하기로 한 것 역시 성과다.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북한 및 중국과의 관계다. 문재인 대통령은 미북 대화가 '판문점·싱가포르 선언 등을 기초로 한다'는 원칙적 동의를 얻어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만, 쿼드(Quad), 남중국해 등 중국 견제에 필요한 한국의 참여를 확보했다. 더구나 대만해협의 평화 언급은 한중 수교 이후 한미 공동성명에서 처음 명시됐다. 양측 모두 원했던 것을 절충해 얻은 결과로 보인다.
공동성명은 양국 정상의 회담 내용이나 합의 사항을 기록한 외교문서다. 법적인 구속력은 없다. 그럼에도 '정치적 약속'인 만큼 도의적 구속력은 물론 실질적 구속력도 갖게 된다.
문재인 정부는 공동성명에 판문점과 싱가포르 선언을 언급한 것에 대해 '최대 성과'라고 말한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동의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무엇보다 북한이 가장 원하는 제재 해제에 대해 공동성명은 '유엔 안보리 결의 완전 이행'이라고 못 박았다.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안 하면 제재 해제도 없다는 뜻이다.
김정은이 바라는 미북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바이든 대통령은 "김정은의 핵(核) 무기고에 대한 논의 약속이 없으면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같은 '쇼’는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바이든 대통령은 “북한 비핵화에 대한 어떤 환상도 없다”며 북한이 싫어하는 인권 문제까지 공동성명에 명시했다.
한국군 55만명에게 접종할 백신 공급을 확약한 것도 그냥 선물 보따리를 던져준 것이 아니다. 복선(伏線)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그동안 문재인 정부는 한미 연합훈련을 하지 않는 이유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확산 위험을 거론해왔다. 결국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백신 제공은 코로나 19를 핑계로 내세우는 일은 그만하라는 의미일 수 있다.
미사일 사거리 족쇄를 풀어준 것 역시 동맹을 통한 중국 견제를 강화하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공군과 혈투를 벌였던 6·25 영웅에게 최고 훈장을 수여했는데, 이는 한미동맹의 ‘뿌리’를 강조하려 한 것으로 읽힌다.
공동성명은 미국의 중국 견제로 깔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쿼드의 중요성 인식', '남중국해 항행 자유 존중, '해외 인권·민주화 증진'은 중국의 팽창과 인권을 노골적으로 겨냥한 것이다. 또한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 인공지능(AI)과 5세대(5G) 이동통신 등 경제와 첨단기술 분야에서의 협력은 중국 배제를 전제로 한 것이다.
소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문 대통령 귀국 길에 주요 수행원 중 한 사람은 중국에 들러 회담과 관련해 설명해줬으면 좋겠다"는 게시물을 올렸다 비난이 쇄도하자 삭제한 것도 이 같은 점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이번 한미 정상회담, 특히 성의가 돋보인(?) 오찬은 바이든 대통령의 식탁 정치이자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격언을 다시금 확인하게 한 셈이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보면 그동안 논란을 빚어 온 문재인 정부의 ‘중국 경도론’이 어느 정도 희석된 것처럼 보인다. 반대 급부로 중국 리스크 역시 현안으로 부상할 공산이 크다. 일부에서는 중국의 시진핑 정부가 압박해 올 경우 문재인 정부가 한미 공동성명에서 약속한 입장을 실행 및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시각을 내놓고 있다.
올해 초 패권 경쟁중인 미국과 중국 정상은 1월 26일과 2월 4일 등 9일 간격을 두고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했다. 이 통화에서 공통적으로 양국 정상이 내세운 의제는 '협력'이었다. 이는 곧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 즉 줄타기 외교를 해 온 문재인 정부에 "누구 편에 설 것이냐"를 묻는 압박 메시지일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읽힌다.
문재인 정부가 미중 패권 경쟁의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하지만 동맹이란 관점에서 보면 미국과 중국의 차이는 분명하다. 미국은 지난 70년간 공산주의 위협을 막아내며 기적 같은 경제 번영을 이뤄낸 밑바탕이다. 중국이 내세우는 중국몽(中國夢)은 동북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지배적인 나라가 되겠다는 패권 전략이며, '돈'과 함께 전랑(戰狼) 외교가 특징이다.
랑은 이리, 즉 늑대를 말한다. 자국보다 약한 나라를 다루는 중국의 외교 방식 가운데 하나다. 우리나라에 대한 중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압박이 대표적 사례다. 중국은 지난 2016년 6월 사드 배치에 대한 보복으로 한류 스타나 한국산 제품을 규제하는 한한령(限韓令)을 내려 지금껏 유지하고 있다. 또한 통관 기준을 높이고 뜬금없는 반덤핑 조사에 나서는 등 무역 규제를 통한 한국 기업 때리기를 노골화한 바 있다.
미국에는 이 말 하고, 중국에는 저 말 하는 식으로 오락가락할 경우 신뢰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위험성도 크다. 더구나 어렵사리 복원되고 있는 한미동맹 역시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국내 정치는 실수를 해도 고치면 되지만 외교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 청년일보=정구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