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3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태생은 일본인, 마음은 한국인"...일본인 독립운동가 '눈길'

국가보훈부 '승격'…국가유공자에 대한 보다 폭 넓은 예우
국립서울현충원 보훈부로 관할 변경…순직공무원도 안장
일본인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후세 다쓰지' 눈길

 

【 청년일보 】 국가 기념일인 현충일과 6.25전쟁일 등이 있는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올해 눈에 띄는 변화로 국가보훈처가 지난 5일 부터 국가보훈부로 승격되어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다 폭 넓은 예우가 가능해질 전망이다. 

 

6일 정부에 따르면 국가보훈부(이하 보훈부)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위대한 헌신, 영원히 가슴에"라는 주제로 국가를 위해 희생·헌신하신 분들이 범국민적으로 예우와 존중받는 보훈 문화 확산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 

 

특히, 국민이 일상 속에서 체감하는 일류보훈 구현을 위해 '끝까지 찾아야 할 121879 태극기배지 달기 캠페인'·'제복근무자 감사캠페인' 등 국민이 참여하고 체함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보훈부 관계자는 청년일보와의 통화에서 "국가보훈부로 바뀌게 되면 독자적인 부령 발령권이 생기게 되고, 기존에 장관급이긴 했지만 국무위원이 아니다 보니 없었던 국무회의 심의 의결권을 갖게 된다"며 "정책과 관련된 부분은 차차 발표될 것"이라고 밝혔다.

 

◆ 국립서울현충원 보훈부로 관할 변경…순직공무원도 안장

 

보훈부 승격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이 설립 약 70년 만에 국방부 관할에서 보훈부 관할로 변경됐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국립현충원은 서울과 대전에 위치해 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희생과 공헌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국군묘지 설치문제는 지난 1949년 말부터 논의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중단된 바 있다. 전쟁 중에 전사자 수가 증가하자 중단되었던 국군묘지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었고, 군 내부에서 후보지를 선정하기 위한 검토가 진행됐다.

 

지난 1953년 1월 9일, 6.25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든 무렵 당시 국방부장관 신태영은 국무회의의장 앞으로 '국군묘지 설치에 대한 건의서(이하 건의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3군 합동 국군묘지답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답사한 결과 서울특별시외 우이동 부근일대를 국군묘지로 선정 할것을 건의하고, 이에 대한 최종 결정을 국무회의에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후 국방부는 지속적인 답사를 거쳐 현재의 동작동 위치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최종 확정했다. 

 

묘지공사는 지난 1954년 3월 1일 시작하였고, 1957년 238.017㎡의 묘역을 조성하였으며 1968년에 광장, 공원행정지역 등의 정비를 완료했다.

 

국립현충원 안장기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했다.

 

지난 1956년 '군묘지령' 제정 당시에는 ‘전사 또는 순직한 군인, 군무원’이 안장되었으나 1965년 '군묘지령'에 의하여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군인, 군속으로 사망한 자'외에 '국가에 유공한 자'로 확대됐다.

 

국가에 유공한 자는 국장으로 장의된 자·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 경찰관·국가 또는 사회에 공헌한 공로가 현저하여 주무부장관의 제청에 의하여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지정한 자가 포함됐다.

 

지난 2006년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국립현충원의 국립묘지 안장자 범위가 더욱 확대되어 '순직공무원(화재진압·인명구조·산불진화·교정업무 등)·의사상자·독도의용수비대 등'이 추가됐다.

 

아울러 국립현충원에는 '국가원수·임시정부요인·애국지사·무후선열·국가유공자·장군·장병·경찰·외국인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국가원수 묘역에는 1965년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이 최초로 안장되었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김대중·김영삼 대통령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그 외에 박은식·신규식·노백린 등 임시정부요인 18위, 무후선열제단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 후손이 없거나 유해마저 찾을 길이 없는 순국선열 위패 131위·이영민·신돌석 등 애국지사 259위·장군 371위 외에 수많은 장교·부사관·사병·군무원·경찰·무명용사 등이 안장되어 있다.

 

 

◆ 일본 태생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후세 다쓰지'

 

국가보훈부는 매달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하는데 이 중 올해 5월의 독립운동가로 가네코 후미코·후세 다쓰지가 선정됐다. 

 

가네코 후미코(1903~1926, 애국장)는 조선 농민들을 착취하는 고모부 가족 밑에서 가정학대를 받고 자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해 깊은 이해와 공감을 갖게 되었고 1919년 3월 부강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크게 공감하면서 저항 의식을 키운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지난 1922년 5월 독립운동가 박열과 만나 동거하고 둘은 항일 의열투쟁을 함께 전개했다.

 

이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도쿄를 비롯한 관동 일대에 일어난 대지진의 혼란과 공포 와중에 조선인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많게는 2만3천여 명까지 정확한 피해자 수를 알 수 없는 학살의 근거는 '조선인이 방화했다'·'누군가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였다. 

 

이 사건으로 요주의 인물이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수감되었고 그들은 조선인대학살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려는 일본 정부에게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투쟁을 벌였다. 

 

가네코 후미코는 수많은 회유에도 불구하고 전향을 거부한 채 예심판사에게 폭탄유입 계획을 당당히 밝히고 1926년 2월 26일 도쿄 대심원 법정에서 열린 공판에서 조선 치마저고리를 입고 출정해 자신을 '박문자'라고 밝히기도 했다. 

 

수감된지 몇년 지나지 않은 1926년 7월 23일 아침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타살 의혹이 많은 상태에서 교도소 측은 그녀의 시신을 서둘러 인근 들판에 가매장했다. 후에 동지들이 유해를 발굴하고 유골을 수습해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 팔령산 기슭에 묻어 주었다.

 

이어 지난 2003년 12월 박열의사기념공원이 조성됨에 따라 그녀의 유해는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번지 기념관 앞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에 끼친 그녀의 공로를 인정하여 지난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후세 다쯔지(1879~1953, 애족장)는 변호사로서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려는 일본 정부에 의해 '대역사범'의 누명을 쓰고 법정투쟁을 벌이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변론을 맡았다. 

 

그가 처음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만난 사건은 1919년 2·8 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최팔용·백관수 등 9명에 대한 '출판법 위반사건'을 변호하면서부터로 알려졌다. 

 

그후 그는 봉건지주층과 동양척식회사를 상대로 전개한 나주 농민들의 토지반환 투쟁을 조사하고, 조선공산당 사건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잔혹한 고문 실태가 폭로되어 항의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으며 1946년 박열의 요청을 받아 '조선건국헌법초안사고'를 집필하고, 그의 투쟁을 정리한 '운명의 승리자 박열'을 출간했다.
 


【 청년일보=최철호 기자 】




청년발언대

더보기


기자수첩

더보기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