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밀가루와 설탕 등 국민 식생활의 기초가 되는 생필품 시장에서 수년간 조직적인 가격 담합이 이뤄진 사실이 드러나 관련 업체와 임직원들이 무더기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이들이 가격 인상 여부와 폭, 시기 등을 사전에 합의해 시장 질서를 교란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형사 처벌과 별도로 공정위 과징금 외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까지 논의될 수 있으며, 징벌적 손해배상 규정이 적용될 경우 기업 부담이 크게 확대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6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나희석 부장검사)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생활필수품 담합 사건을 집중 수사해 총 52명을 지난 2일 재판에 넘겼다.
밀가루 시장에서는 대한제분·사조동아원·삼양사·대선제분·삼화제분·한탑 등 제분사 6곳 대표이사를 포함한 20명이 불구속기소 됐다. 이들은 2020년 1월부터 지난해 10월 사이 국내 밀가루 가격 변동 여부와 폭, 시기를 사전에 합의한 혐의를 받는다.
해당 기간 담합 규모는 5조9천913억원으로 조사됐으며, 가격은 최고 42.4% 상승했고 이후에도 담합 이전 대비 22.7% 높은 수준을 유지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설탕 시장에서도 CJ제일제당·삼양사 등 제당사들이 2021년 2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설탕 가격 변동 폭과 시기를 합의한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담합 규모는 3조2천715억원, 가격 상승 폭은 최대 66.7%에 달했다.
검찰은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요청권을 행사해 사건을 넘겨받은 뒤 대표급 임원 2명을 구속기소하고 9명을 불구속기소, 2개 법인을 기소했다.
부당이득액은 산정 방식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밀가루의 경우 약 1천70억원에서 3천124억원 수준으로 추정되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인 매출의 15%를 적용하면 8천986억원에 이른다는 분석도 제시됐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는 업체들이 공정위를 '공선생'이라 지칭하며 단속을 피하려 한 정황과, 하드디스크 파손 지침 등 증거 인멸 시도도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사안의 중대성을 강조하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동현 새문안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담합 규모가 밀가루 약 6조원, 설탕 약 3조원에 이르고 대표이사급 임원까지 연루된 데다 가격 인상 폭도 최대 66.7%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민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중대 담합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검찰이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완료 이전에 독자 수사에 착수하고 대표급 임원을 구속기소한 점,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가 직접 수사를 맡은 점 역시 사안의 중대성을 반영하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법원 양형 과정에서도 '생필품 담합'이라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김 변호사는 "밀가루와 설탕은 빵·라면 등 국민 식생활의 기초 식재료에 해당한다"며 "법원은 양형 과정에서 범행의 사회적 해악과 피해 범위, 회복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만큼, 전 국민에게 피해가 전가된 생필품 담합은 실질적인 가중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형량 전망과 관련해 그는 "공정거래법상 담합죄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2억원 이하 벌금형이 규정돼 있고, 최근 관수철근 담합 사건에서 주도자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가 선고된 바 있다"며 "이번 사건은 담합 규모와 기간, 국민경제에 미친 영향 등을 감안할 때 주도자에게 징역 1년 안팎이 선고될 가능성이 있고, 집행유예 여부가 주요 쟁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장기간에 걸친 담합 사실 역시 양형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 변호사는 "밀가루는 약 5년, 설탕은 약 4년간 담합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상습성과 계획성을 인정받을 소지가 크다"며 "과거 유사 담합으로 제재를 받은 전력이 있는 기업이라면 양형상 더욱 불리하게 평가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손해액 산정 문제도 거론됐다.
그는 "손해액은 담합이 없었을 경우 형성됐을 가상 경쟁가격과 실제 담합가격의 차이를 기준으로 산정한다"며 "검찰 발표대로 밀가루 42.4%, 설탕 66.7%의 가격 인상률이 입증된다면 이를 토대로 소비자 전가분까지 포함한 손해액 산정이 가능하고, 검찰이 추정한 부당이득액은 민사소송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형사 유죄가 확정될 경우 민사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형사 유죄가 확정될 경우 민사 손해배상 소송에서 위법성 입증이 비교적 수월해져 집단소송 가능성도 제기될 수 있다"면서도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증권 분야에만 집단소송제가 적용되고 일반 소비자 집단소송제는 도입되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어 "개별 소송이나 소비자단체소송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손해 입증의 어려움과 소송 비용 부담 등으로 실제 소송이 대규모로 진행되기에는 제약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기업 부담 측면에서는 과징금 외에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적용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공정거래위원회 과징금(관련 매출액의 최대 20%)과는 별도로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될 수 있다"며 "공정거래법상 손해액의 최대 3배까지 배상하도록 한 징벌적 손해배상 규정이 2020년 도입된 만큼, 악의적 담합으로 판단될 경우 기업 부담이 수천억원대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담합 행위가 반복되는 배경에는 처벌 수준과 제도적 억제력의 한계가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검찰 발표대로 행위자에 대한 처벌이 지나치게 경미했던 점이 담합이 반복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며 "과거에는 법인에 대한 벌금형이나 실무자급 처벌에 그친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 대표이사급을 구속기소한 것은 의미 있는 변화"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현행 법정형 상한이 3년에 불과하고, 미국처럼 부당이득의 3배에 해당하는 벌금이나 실형 선고가 일반화돼 있지 않아 억제력이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법원의 제재처분(금전적)이 중대해야 기업들도 보다 신중해지는 구조가 형성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청년일보=권하영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