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국제화를 통한 지속가능한 연구 생태계 조성을 위해 효율성 중심의 제도혁신 방안이 추진되면서 학계를 중심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과학기술 분야 신규 과제 창출도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내실화를 위한 R&D 예산 삭감 기준의 모호성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청년일보는 기술 패권주의 세계 경제 전환 속에 추진되고 있는 정부R&D 제도혁신 방안에 대한 학계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上) 'R&D 국제화'로 경쟁 주도권 확보…'첨단기술' 사업화 집중
(中) 과학기술 분야 신규 과제 창출 미지수…"경쟁력 약화 우려"
(下) 내실화 외치며 R&D 예산 삭감…모호한 기준에 학계 '끌탕'
【 청년일보 】 정부가 지난 8월 국무회의에서 '2024 예산안' 및 '2023~2027 국가운용계획'을 의결한 가운데 당시 학계의 관심은 국가 R&D(연구개발)사업 예산안에 쏠렸다.
여당의원들이 참석한 R&D 관련 실무당정협의에서 R&D의 비효율과 카르텔적 요소가 R&D 내실화 저해요인이라고 지적하며 사실상 대규모 구조조정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가 R&D 예산 16% 삭감을 발표하자 연구 현장에서는 이를 두고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내며 혼선을 빚고있다.
◆ 정부, 내년 R&D 예산 16.6% 감소
기획재정부가 밝힌 '2023~2027 국가운용계획'에 따르면 올해 31.1조원이었던 R&D 예산이 내년 16.6% 감소해 25.9조원으로 줄어든다.
특히 보건·복지, 교육, 문화·체육·관광 등 국가 예산이 투입되는 총 12개 분야에서 올해보다 내년예산이 줄어든 분야는 R&D를 비롯, 교육(96.3조→89.7조, 6.9% 삭감), 일반·지방행정(112.2→111.3조, 0.8% 삭감)단 3개 분야 뿐이다.
R&D 분야의 삭감폭은 예산 삭감이 예정된 분야 중 가장 컸다. 삭감 자체도 33년만에 처음이라는 평가다.
정부는 이같은 R&D분야 예산 삭감에 대해 '나눠먹기‧성과부진 사업 점검을 통해 108개 사업 통‧폐합 등 3.4조 원 구조조정'을 단행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연구현장과 만나 예산 삭감에 대한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과기부 지난 8월 24일 25개 출연(연) 기관장들이 참석한 간담회에서 과거 산업구조에 기반한 기관 운영 시스템, 경직적인 조직·인력 운용으로 인해 현재에는 기관 간 칸막이가 고착화됐다고 진단했다.
또 출연(연)이 급변하는 기술·환경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과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대형성과를 지속적으로 창출하지 못한다는 외부의 시선이 있음을 언급하며 현재 출연(연)의 운영 시스템에 대한 혁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아울러 과기부는 학계에서 지적되어온 연구개발 예타에 대한 제도개선을 주제로 전문가 간담회를 진행했다.
과기부에 따르면 현행 연구개발 예타 제도는 연구시설‧장비 등과 같은 유형적 산출물이 아닌 지식‧기술 창출이 주목적인 사업(기술개발형 R&D)의 불확실성을 고려하기에 한계가 있고, 사업 기획에서 착수까지 평균 3년 이상 소요되어 빠른 기술변화에 적시 대응이 어렵다는 평가다.
향후 과기부는 재정당국과 협의하고 전문가 등의로 부터 의견수렴절차를 거쳐 예타 제도개선에 나설 계획임을 밝혔다.
정부는 앞서 예산안과 국가운용계획 발표, 연구현장과의 간담회, 제도 개선 등 일련의 행보를 통해 R&D분야 내실화에 대한 의지를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연구현장에서 연구종료기간이 도래함에도 당초 계획됐던 장비 도입이 완료되지 않은 경우도 다수 드러나기도 했다.
박완주 의원실에 따르면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올해 말 '인체보호성능이 강화된 환경친화적 마스크필터 소재개발' 연구 종료를 앞두고 있지만, 당초 목표했던 생분해도 측정기 장비 1종은 여전히 도입 예정인 것으로 조사됐다.
박의원은 연구과제 관리 감독 강화를 통해 R&D 내실화를 해야한다고 지적했다.
◆ 정치권, R&D 예산 삭감 기준에 대한 의구심 제기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정부의 R&D 예산 삭감 기준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이정문 의원이 과기부 등 국가 R&D를 수행하는 주요 부처의 2024년 예산안을 분석한 결과, 과기부가 '비효율'이라고 지목한 ▲경쟁률 낮은 R&D(632억원) ▲성과평가 미흡·부적절 R&D 예산(6천52억원)이 오히려 6천684억원 증액된 것으로 확인됐다.
구체적으로 이 의원에 따르면 과기부는 ▲뿌려주기식 ▲경쟁률이 매우 낮은 ▲유사중복 ▲보조금 성격형 ▲성과평가 미흡·부적절 R&D 사업을 '비효율' R&D 예산으로 규정하고, 해당 사업들을 2023년 1천526억원에서 2024년 254억원으로 80% 넘게 삭감(1천272억 삭감)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해 윤석열 정부에서 발표한 '2022~2026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해당 사업들은 오히려 126억원 증액된 1천653억원이 2024년 예산안에 반영될 예정이었다. 게다가 2022년 사업효과도 100% 수준이고, 예산 비효율에 대한 외부 지적 사항도 없는 상황에서 예산이 대폭 삭감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과기부가 비효율적이라고 지목한 R&D 사업들이 주요 부처 예산안에서는 오히려 증액된 것으로 나타나 정치권에서는 과연 이번 R&D 예산 삭감에 제대로 된 명분과 논리가 있는 것인지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의 삭감기준에 맞지 않는 사례는 또 있다.
산업부 '소재부품기술개발' 내역사업 중 '반도체 ALD 공정용 서셉터 개발', '6G용 초고주파 저손실 소재·통신부품 개발' 과제가 경쟁 없이 민간 기업이 단독 입찰을 따냈음에도 전체 예산은 오히려 2천34억원 증액되어 단독 입찰 사업 중 가장 많은 예산이 증액됐다.
또 교육부의 '지자체-대학 협력기반 지역혁신 사업'은 ▲종합적 성과분석 보고서 및 대표성과소개서 미제출 ▲성과의 핵심성을 판단할 근거 부재 ▲환류계획이 지침에 따라 평가되었는지에 대한 판단 불가 등으로 인해 R&D 중간평가 상위평가에서 '부적절' 결과를 받았음에도 올해 예산 (3천540억원)대비 2024년 예산(1조 2천25억원)이 무려 4배 가까이 증액(8천485억원)됐다.
반면 우수 사업에 대한 예산이 대폭 삭감된 사례도 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김경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올 5월 국가연구개발사업 자체평가에서 '우수' 평가를 한 10개 R&D 사업 중 9개 사업의 내년도 예산(정부안)을 대폭 삭감했다.
특히 글로벌주력산업품질대응뿌리기술개발 사업은 우수 평가를 받았음에도 예산이 올해 264억원에서 내년 20억원으로 대폭 줄었다.
이러한 상황에 정치권에서는 정부의 R&D 분야 예산 삭감기준을 납득할 수 없으며 정부가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과학기술분야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지적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 기초과학계 반발에 간담회 답변중복의혹까지…학계 일부, 자성 목소리도
이번 R&D 분야 예산 삭감에 당사자인 학계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그 중 기초과학 학회협의체(이하 기과협)는 지난달 25일 성명서를 내고 "정부가 연구자들에게 큰 충격과 우려를 던져줬다"고 밝혔다.
이어 기과협은 이번 R&D 분야 예산 삭감을 정부의 '편견과 졸속'의 결과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기초과학 분야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투자가 이뤄질 때 발전이 가능하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번 조치가 "대한민국에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기과협은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 조정 원점재고 ▲진정성 있는 비전과 실질적인 육성 전략 제시 ▲일방적인 연구지원체계의 변경 지양 ▲과학기술인의 목소리를 경청해 입안 과정에 반영 보장을 요구했다.
과기부는 이같은 학계의 반발을 의식한 듯 최근 잇따라 연구현장과의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장관뿐만 아니라 차관도 나서 학계의 의견을 듣겠다며 지난 25일에는 이른바 '릴레이 간담회'까지 진행했다.
일각에서는 간담회가 모양내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간담회 참석자가 겹쳐 답변 중복성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과기부 관계자는 "젊은 학자들을 모실 때 전체 중복은 아니고 한 두분 정도 여기저기 참석한 분들은 있다"며 "나머지 7~8분은 처음 참석하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새로운 의견 제시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간담회 과정에서 예산 삭감에 대해 '확실히 끝난거냐' 등의 우려도 제기됐다"며 "예산 심의 과정이 남아 아직확정된 것은 아니고 정부 방향이 이렇다고 설명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학계 일각에서는 예산 삭감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면서도 학계 스스로 내실화에 노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서울 소재 대학에 재직 중인 한 연구교수는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기 어려워져 학계내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는것은 사실이고 사회·인문과학쪽은 거의 전멸할 거라는 얘기도 돈다"면서도 "연구비 부정 수급과 같이 학계가 자성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 청년일보=최철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