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보험사들이 공공의료 데이터를 상품 개발에 활용할 수 있는 길이 다시 열렸다. 지난 2017년 10월 국정감사 이후 보험사에 대한 공공의료 데이터 제공이 전면 중단된지 4년여 만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지난 2013년 공공의료 데이터를 개방했다. 2014년부터는 보험사에도 의료수요 분석이나 상품 개발을 위해 비식별 처리한 공공의료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비식별화된 데이터라고 할지라도 보험사에 제공될 경우 가입 차별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중단됐다. 이에 따라 국내 보험사들은 새로운 보험상품이나 헬스케어 서비스를 만들면서 우리 국민의 건강정보와 동떨어진 호주나 일본 등 해외 데이터를 쓰게 됐다.
상황이 재차 바뀐 것은 지난해 1월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신용정보법·정보통신망법)이 개정됐기 때문이다. 공공의료 데이터를 다시 활용할 수 있는 법적 토대가 구축된 것이다. 보험사의 공공의료 데이터 접근이 재개된 데 따른 의미와 영향을 상, 중, 하 3차례에 걸쳐 알아본다.
[글 싣는 순서]
(상) 공공의료 데이터 활용한 맞춤형 보험상품 시대의 개막
(중) 보험상품 개발 가시화···고령자·유병력자 전용상품 확대
(하) 공공의료 데이터 활용의 '그림자'···유출 방지 대책 필요
【 청년일보 】 공공의료 데이터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 등 공공기관에 축적돼 있는 병원 이용 환자들의 병력, 그리고 치료 내역 등을 말한다.
지난해 1월 데이터 3법이 개정되면서 보건복지부는 가명 처리된 정보는 통계 작성, 과학 연구 등의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보건의료 데이터 활용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정보 주체의 동의 없이도 가명 정보를 활용할 수 있게 됐다.
보험사가 공공의료 데이터를 활용하려면 2단계의 사전 허가를 얻어야 한다. 생명윤리위원회로부터 사회적·윤리적 타당성 평가를 받아야 하며, 이를 통과하면 심평원의 데이터제공심의위원회를 거쳐야 한다.
보험사는 심평원의 망(網)에 접속해 데이터를 분석한 후 그 결과값을 통계 형태로 반출한다. 보험사가 고혈압 관련 상품 개발을 진행 중이라면 가명 처리된 고혈압 관련 환자의 데이터를 얻어 분석하는 방식이다.
보험사들은 공공의료 데이터를 활용할 경우 더욱 다양한 상품 및 서비스를 선보일 수 있다. 갑상선 기능 항진증을 예로 들어보자.
갑상선 기능 항진증은 갑상선에서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돼 갑상선염이나 갑상선암 등을 일으킬 수 있다.
보험사는 환자의 데이터가 부족해 손해율 산정이 어려워 상품을 개발하고 싶어도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하지만 공공의료 데이터를 확보하게 되면 전용상품 개발이 가능하다.
특히 중대 질환의 경우 발생 이력과 발병의 순차 패턴도 분석할 수 있다. 간수치가 높아진 환자가 간경화, 이후 간암 등을 앓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때 질병 악화 방지를 위해 보험사가 사전 예방 서비스를 제공하는 보험도 등장할 수 있다.
또한 보험사가 헬스케어 관련 플랫폼 서비스도 할 수 있다. 글로벌 보험사인 AXA와 중국 핑안보험 등은 운동용품, 건강식품, 건강기기 등을 판매하는 헬스몰을 자회사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과거 보험산업이 급성장할 때는 고객의 질병 기록이 보험 가입 거절의 사유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포화 시장에서는 새로운 수요를 발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비식별 공공의료 데이터를 활용하면 기존에 보장하지 못한 분야에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 난임보험·소아비만보험 등 사각지대 놓였던 '맞춤형 상품' 개발
심평원으로부터 공공의료 데이터 사용을 승인받은 국내 6개 보험사는 그동안 보험시장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던 고령자·유병력자 등을 위한 상품 개발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들은 먼저 고혈압 환자의 심‧뇌혈관 질환 발생 위험도를 분석해 고혈압 환자 전용 상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또 난임치료 같이 기존에는 보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의료비 부담이 높은 위험에 대해서는 보장 내역을 세분화하면서 보장 범위도 넓힐 예정이다.
소아비만에서 동반되는 동맥경화 등을 보장하는 상품도 개발될 예정이다. 골다공증 환자의 데이터를 분석해 골절사고를 예방하고 관리하는 맞춤형 상품도 선보일 것으로 보인다.
건강나이 등 객관적 데이터 활용이 가능해져 보험료 할인 효과도 기대된다. 기존에는 실제 나이에 기준을 두고 보험료를 산출해 건강상태가 양호해도 높은 보험료를 적용 받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건강나이에 맞춰 보험료를 적용받을 수 있게 된다.
KB손해보험은 올 하반기 출범을 목표로 '디지털 헬스케어 자회사'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공공의료 데이터를 기반으로 고객별 건강상태 분석, 맞춤형 건강관리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다른 보험사들도 이 같은 헬스케어 자회사 설립을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공공의료 데이터의 신산업 동력화 및 국가 자산화 지향할 필요
보험연구원의 손재희 연구위원, 이소양 연구원은 지난 5월 '공·사 보건의료 데이터 공유 사례와 시사점' 리포트를 통해 공공의료 데이터 활용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조명했다.
현재 핀란드, 대만, 일본 등 해외 각국은 공공의료 데이터의 잠재적 가치에 주목해 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국민의 건강관리 능력 향상은 물론 신산업 동력화 또는 국가 자산화로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핀란드는 지난 2007년부터 미래 신산업 동력 확보를 목적으로 e-헬스 로드맵 정책을 추진했다. 사회복지∙진료기록, 유전체 데이터 등을 통합 관리하는 '칸타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2019년에는 공공의료 데이터 활용의 활성화를 위해 데이터 활용법을 개정, 구축된 통합 데이터를 외부에 개방했다. 통합 데이터를 과학 연구, 통계 작성, 지식 경영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활용 범위를 넓힌 것이다.
대만은 중앙건강보험청(NHIA)이 보유한 의료∙약제∙검사 데이터를 지난 2013년부터 디지털화했으며, 최근에는 개인 건강 데이터를 망라한 빅데이터 플랫폼 구축을 시작했다. 앞서 NHIA는 지난 2000년부터 건강보험 가입자의 의료 정보를 학술·비학술 목적으로 광범위하게 개방했다.
물론 부작용이 있었다. 개인정보를 불법으로 수집한 텔레마케팅 회사 등이 있어 데이터 제공을 한차례 중단한 것이다. 하지만 정보 활용 목적 및 필요성 등을 심의·결정하는 시스템을 마련해 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를 차단했다.
일본은 2025년까지 개인건강 데이터 통합 플랫폼 ‘PeOPLe(Person centered Open Platform for well-being)를 구축, 언제 어디서나 본인의 건강 데이터를 조회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 보험사는 일본의료데이터센터로부터 받은 건강나이 기반의 정보를 바탕으로 상품 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앞서 일본은 2017년 5월 차세대 의료기반법을 제정해 익명가공 의료정보 개념을 도입, 연구개발∙신산업 발굴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 바 있다. 특히 일본 정부는 높은 정보보안∙익명가공 기술을 보유한 기업에게 ‘익명가공 의료정보 작성 사업자’ 인증을 부여해 의료정보 활용을 독려하고 있는 상황이다.
【 청년일보=최시윤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