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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여론조작은 민주주의 병들게 하는 후진국형 국기문란 범죄

인터넷 시대의 도래는 소수 일당이 여론 조작할 수 있는 환경 만들어내
한국 사회 움직이는 '큰 손' 여론조사도 여론조작의 혐의 벗어나지 못해

 

【 청년일보 】 여론(輿論)이란 사회 구성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인정되는 의견을 말한다.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인정되기 때문에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다.

 

실제 현대정치는 모든 활동을 여론과 연결시켜 정당성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국민, 특히 유권자의 표(票)가 절대적인 현대정치에서 여론을 동반하지 않을 경우 정치적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수의 의견이 조작될 수 있으며, 이 같이 왜곡된 여론이 선동에 이용된다는 것이다. 한번 만들어진 여론은 사회 구성원 모두 혹은 과반수가 납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 사라지기도 힘들다.

 

특히 인터넷 시대의 도래는 소수가 여론을 조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냈다. 매크로 프로그램, 다중 계정, 댓글 알바, 카페 회원을 동원해 조작된 의견을 불특정 다수의 의견인 것처럼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이 대표적이다.

 

인터넷 댓글 분석 사이트 워드미터의 지난 2018년 조사에 따르면 포털 네이버의 뉴스에는 하루 11만333명이 25만9511개의 댓글을 단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네이버 뉴스의 하루 평균 이용자 1300만명의 0.9%며, 적극적으로 댓글을 다는 이용자는 0.029%에 불과하다고 한다. 네이버는 1%의 아이디(ID)가 전체 댓글의 70~80%를 작성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일반적으로 포털 이용자들은 뉴스를 중요도 순으로 본다. 이 같은 상황에서 수백 개의 아이디를 동원해 매크로 프로그램을 돌리면 순식간에 댓글 공감수를 늘려 베스트 댓글을 선점할 수 있다. 매크로 프로그램은 반복되거나 여러 절차가 필요한 행위를 컴퓨터가 자동으로 한번에 처리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렇게 되면 침묵의 나선 이론이 현실화된다. 자신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과 동일하면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만 소수 의견일 때는 남에게 나쁜 평가를 받거나 고립되는 것이 두려워 침묵하게 된다. 여론의 형성 과정이 한 방향으로 쏠리는 모습이 마치 나선 모양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드루킹 일당은 바로 이 같은 심리효과를 노린 것이다.

 

댓글조작은 밴드왜건 효과도 불러 일으킨다. 밴드왜건은 서커스나 퍼레이드 행렬의 맨 앞에 선 악단이 탄 마차다. 밴드왜건이 지나가면 사람들이 우르르 쫓아가듯 주류의 견해를 따라가는 현상인데, 선거에서는 우세하다고 가늠되는 후보 쪽으로 유권자의 표가 집중되는 것을 말한다.

 

지금은 폐지됐지만 실시간 검색어 순위 조작 역시 매커니즘은 마찬가지다. 20명이 아이디 100개씩만 동원해도 2000개가 된다. 2000개 정도면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1시간 내에 1위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미국처럼 유력 포털이 여러 개로 분산돼 있으면 효과가 반감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네이버라는 공룡 포털 하나만 집중 공략하면 되는 만큼 비용 대비 효과가 엄청나다.

 

댓글조작 총책 드루킹은 "대중은 대부분의 뉴스를 포털, 특히 네이버를 통해 본다. 그러니 여론이란 네이버 뉴스에 달린 베스트 댓글인 것이다. 온라인에서 지면 오프라인에서도 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적중했다. 댓글과 실시간 검색어 순위 조작을 통해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는 가짜 여론이 선거판을 뒤흔들었다. 한때 지지율 1위에 올랐던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안철수는 MB 아바타'라는 파상적인 댓글 공격에 기세가 꺾였다. 대선 출마를 위해 귀국한 반기문 전 유엔(UN) 사무총장도 '기름장어'라는 조롱 댓글에 무너졌다.  

 

조금 범위를 넓히면 여론조사 역시 여론조작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론은 사회 구성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인정되는 의견이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의견의 집합체인 만큼 이를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대안으로 이용하는 것이 통계(統計)를 활용한 여론조사다.

 

올바르고 비교적 정확한 여론조사는 좋은 정책, 좋은 상품, 좋은 서비스를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정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여론조사를 실시할 때 엉터리 통계 기법과 특정한 목적을 가진 해석의 틀을 적용하면 여론이 왜곡될 수 있다. 영국에서 두 번이나 총리를 지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세상에는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의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고 말한 이유다.

 

현재 여론조사는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큰 손'이 됐다. 청와대의 국정운영 방향, 정당의 공천자 결정, 정부의 국책과제 추진 여부 등 주요 이슈마다 여론조사는 영향을 미친다. 선거에 나선 후보의 지지율 여론조사는 더욱 그렇다. 우세한 후보에 편승하는 밴드왜건 효과는 물론 선거 구도를 판가름하는 무당층이나 중도층 유권자의 선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 정당은 대선 경선과 후보 단일화 때 여론조사를 핵심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만일 여론조사가 엉터리로 이뤄진다면 민심(民心)이 왜곡된 후보를 뽑게 되는 셈이다. 일부 여론조사 업체는 특정 정당이나 대선주자에 편향돼 있다는 의심을 받는 곳도 있다.

 

최근 지지율 여론조사가 너무나 큰 편차를 보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지적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조사한 정당과 대선주자의 지지율이 10%포인트가량 차이가 나고, 같은 여론조사 업체의 지지율도 며칠 만에 순위가 크게 바뀐다. 이렇게 되면 지지율 여론조사는 민심의 현주소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민심 조작의 전파 수단이 된다.

 

이처럼 여론조사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여론조사를 믿지 못하겠다는 여론조사까지 등장했다. 한국리서치가 지난 2019년 9월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선거 시기에 발표되는 여론조사를 얼마나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0.2%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장자크 루소는 모든 정부는 법이나 강제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시민의 의견, 즉 여론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임스 메디슨은 대중의 의견, 즉 여론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진정한 주권자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여론이 진정한 민심을 반영할 때 해당되는 말이다. 여론조작은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 후진국형 국기문란 범죄다.

 

인터넷 시대에서는 소수 의견의 과대 대표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소수의 일당이 손쉽게 여론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론조사는 형식적인 규정 준수 여부를 평가하는 것 외에는 공정성을 모니터링할 기구도 없다. 엉터리 여론조사 결과에 책임도 지지 않는다. 댓글조작의 몸통을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여론조사의 공정성을 수시로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 청년일보=정구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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