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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의 독립투사들"…보훈부, 외국인 독립운동가들 '눈길'

보훈부 매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홈페이지에 공적정보 공개
톰킨스 등 美·英·佛서 독립운동 '전방위' 지원... 독립장·애국장 추서

 

【 청년일보 】 국가 기념일인 현충일과 6.25전쟁일 등이 있는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지난해 부로 승격된 국가보훈부(이하 보훈부)는 국가를 위해 희생·헌신하신 분들이 범국민적으로 예우와 존중받는 보훈 문화 확산을 위해 다양한 사업과 행사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보훈부는 매년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하고, 홈페이지에 이를 게시,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6일 보훈부에 따르면 호국보훈의 달인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3명의 외국인 독립운동가를 선정했다. 


이들은 미주·유럽 출신으로 각각 종교·언론·정치계에서 1919년 한국 독립을 위해 앞장선 공로로 우리정부로부터 독립장 및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플로이드 W. 톰킨스, 美서 한국친우회 창설…"한국 독립운동의 원칙·방향 제안"


1850년 미국 뉴욕시에서 태어난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 주니어(Floyd Williams Tomkins Jr, 이하 톰킨스)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1919년 한국 독립운동의 새로운 기치가 내걸리자 이에 호응하며 한국친우회 결성을 주도했다.


1919년 4월 14~16일간 필라델피아 리틀극장(The Little Theatre)에서 '미주 3·1운동'이라 평가되는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가 열렸다. 


회의 첫 미국인 연사로 나선 톰킨스는 "독립을 주장할 근거가 되는 일에 주력할 것"과 "파리강화회의에서 다뤄진 대원칙에 관심을 집중할 것"을 당부하며 자유·정의·인도 등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한국 독립운동의 원칙과 방향을 제안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를 통해 확인된 한국인과 미국인의 연대는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친한(親韓) 단체 결성으로 이어졌다. 친우회의 회장은 톰킨스가 맡았다.


한인회의 개최를 주도했던 서재필 박사는 이사진으로 참여하며 친우회 활동과 한국인 독립운동가와의 가교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탄압이 국제사회에 알려졌음에도 많은 미국인들은 소위 '중립적' 자세를 견지했지만, 톰킨스는 일본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대중 집회를 주도했다. 특히 그는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 정부의 거중 조정을 각계 인사에 호소하고 요청했다.


아울러 그는 1921년 11월 워싱턴 군축회의 개막을 앞두고, 미국 한국친우회 2만5천여명의 회원을 대표하며 국무장관 휴즈(Charles E. Hughes)에게 청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청원서엔 "일본에 의한 한국 침탈과 한국민의 열망과 배치되는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는 국제적 원성과 비판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결국 세계 여타 국가와 관련된 극동지역의 평화에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경고가 담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32년 사망한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프레드릭 맥켄지, 英서 일제 식민정책 비판


1869년에 캐나다 퀘벡주 리치몬드에서 태어난 프레드릭 맥켄지(Frederick A. Mackenzie)는 1881년 영국으로 건너가 20대 중반부터 영국 런던에서 기자 활동을 시작 후엔 동아시아 지역을 담당하는 종군기자가 되었다. 


러일전쟁을 취재한 그는 당초 일본에 대해 큰 비판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1906년 두 번째로 한국에 도착한 맥켄지가 목격한 일본은 제국주의 팽창에 혈안이 된 나라였다. 


한국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한국인을 탄압하는 일본에 크게 실망한 그는 이를 비판하는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나아가 일본에 맞서 싸우는 의병의 활약상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취재해 이를 세계에 알렸다. 그리고 1907년 말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한국에 머물며 목도한 현실을 '대한제국의 비극(Tragedy of Korea)'이라는 책을 통해 세상에 밝혔다.


이후 맥켄지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비판하고, 한국의 정의로운 저항을 높이 평가하며 이를 역사적 기록으로 남겼다. 1920년 '자유와 정의'를 지지하며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을 발간한 것이다.


한국독립을 지지하는 맥켄지의 신념은 언론·저술활동에만 그치지 않았다. 1919년 11월 김규식을 통해 한국 독립의 선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한 그는 영국에서 지원활동을 시작했다. 


마침 미국에서 구미위원부가 설치되고 한국친우회 활동이 활발해지는 상황에서 김규식 등은 런던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1920년 10월 3일 파리위원부의 황기환(1995년 애국장)이 런던에 도착하자 영국 언론은 '한국사절단(Korean Mission)의 E. K. whang(황기환)'이 일본 통치하에 있는 조국의 비참함을 알리기 위해 왔다고 전했다. 


황기환은 맥켄지의 도움으로 그가 묵고 있던 런던대학(University College London) 인근에 한국대표부 런던위원부 거점을 마련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1920년 10월 26일 런던에서 한국친우회가 창립됐다. 영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창립식에는 로버트 뉴만(Robert Newman) 의원, 르웰린 윌리엄즈(Llewellyn Williams) 전 의원, 라일 새뮤엘(A. Lyle Samuel) 등 정계 인사 등 총 62명이 참석했다. 


여기에서 맥켄지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비판하면서 한국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한국인의 자유 회복을 위한 지원 등을 결의한 뒤 간사로 활약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31년 숨을 거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佛 정치인 루이 마랭, 한국친우회 초대회장 맡아 재정 지원


1871년 프랑스 로젠 지방의 뫼르트(Meurthe-et-Moselle)에서 태어난 루이 마랭(Louis Marin)은 탐험가이자 인류학자이며, 정치인이었다.


프랑스에서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은 파리강화회의에 특파된 김규식에 의해 촉진됐다.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5월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 독립 항고서' 등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 한국 독립을 홍보하는 각종 문서를 언론에 배포했다. 


이어 8월 6일 파리에서 열린 한국통신국의 연회에서 김규식은 한국의 지리와 역사를 소개하고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역설했다.


이때 프랑스 정치인으로 참석한 루이 마랭은 이후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정세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그가 프랑스 한국친우회 결성에 앞장선 것이다.


1921년 4월 영국에서 활동하던 황기환이 파리로 돌아오자 프랑스 한국친우회 결성은 빠르게 추진됐다. 그 결과 1921년 6월 23일 파리 사회박물관에서 한국친우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루이 마랭(Louis Marin) 주재로 시작된 회의에는 쥐스탱 고다르(Justin Godart) 하원의원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루이 마랭은 먼저 "프랑스는 언제나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보호와 애정을 가져왔다"고 환기하며 "3천만의 인구를 가진 불행한 나라 한국이 고통받고 있으며 정의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또한 그는 한국친우회의 초대 회장을 맡아 재정 등을 지원했다.


1945년 9월 일본이 항복하자 프랑스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서영해는 루이 마랭에게 "회장님은 한국이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에 처해 있을 때,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을 도와주고 옹호한 프랑스의 고귀한 양심을 대표하는 분이셨습니다"라며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0년 사망한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청년일보=최철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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