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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견위수명(見危授命) 정신으로 조국 수호"···6·25 전쟁영웅의 회고

'6·25전쟁' 제73주년···참화 속 살신성인 자세 빛낸 노병(老兵) 이야기
교복모자 대신 철모 쓴 18세 김장현 학생···풍전등화 나라 구한 영웅
"조국 지키겠다는 일념"···호적 나이보다 2살 올려 입대 신청서 제출
938고지 탈환 전투서 중공군 방망이 수류탄 맞아···대구 군병원 후송
육군 중령 예편 뒤 창원기계공업공단 총무부장 근무···수출 '숨은 역군'
참전유공자 처우 개선 목소리···"국가, 희생과 공헌 상응하는 대우해야"
불확실성 점증된 국내 안보환경···"철저한 대비 태세·안보의식 갖춰야"

 

【청년일보】 민족 사상 최대의 수난인 6·25전쟁이 발발한 지 어느덧 73년이 지났다. 풍전등화에 빠진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수많은 학생과 청년들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황폐화된 국토를 넋놓고 바라볼 겨를 없이 재건활동에 나섰다. 이들의 근면·성실한 DNA가 오늘날 세계 11위 경제 대국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헌신적인 영웅담(英雄譚)은 시간이 흘러 점차 국민들로부터 망각되어 가는 안타까운 현실에 놓여있다.

 

때는 1950년 6월25일 아직 동이 채 트지 않은 새벽 4시, 북한 공산군은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35년 동안 일본의 불법적인 한반도 점령으로부터 해방된 지 불과 5년 만의 일이며 이른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불리는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6.25전쟁 개요를 살펴보면 북한군은 남한에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했고 수도인 서울을 사흘 만에 함락했다. 

 

설상가상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 위기 직전, 1950년 9월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기세를 몰아 동해안의 청진까지 북진했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38선까지 후퇴했다. 이후에도 밀고 밀리는 되풀이 식의 전투를 벌여오다 마침내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3년여 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국군과 유엔군뿐만 아니라 수백만 명의 민간인들도 죽거나 크게 다쳤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 내용에 따르면 국군 사망자 수는 13만7천899명, 유엔군 사망자 4만670명, 민간인 사망자는 24만4천460명에 달한다.

 

특히 약관(弱冠·20세)도 되지 않은 학생들의 숭고한 희생도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이들은 펜 대신 총을 들고 교복모자 대신 철모를 쓰며 학업은 뒤로 하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여느 또래 친구들처럼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갔던 18세 소년 김장현 군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망백(望百·91세)을 넘은 나이지만 그날의 기억이 아직까지 선명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눈앞의 안위보단 오직 풍전등화에 놓인 국가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적군들과 맞서 싸웠다.

 

오늘날의 국가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줄곧 유지하는데 이같은 살신성인 정신이 빛을 발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무엇보다 풍요보단 가난과 빈곤의 상징이던 대한민국을 G20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눈부신 번영의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한 수출산업 역군이기도 하다. 

 

청년일보는 25일 한국전쟁 73주년을 맞아 2년 째 6.25참전유공자회 감사로 근무하고 있는 김장현(92) 씨를 만나 그날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갓 스물도 넘기 전 스스로 戰場 참전···"나라 위해 싸우겠다는 일념 확고"

 

요근래 극심했던 무더위가 한 풀 꺾이고 촉촉한 이슬비가 내리던 지난 21일 오후, 서울 강동구 길동에 위치한 대한민국 6.25 참전 유공자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6.25 참전 유공자회는 한국전쟁의 역사적 교훈 영구발전과 참전 기념사업 수행을 통해 참전유공자의 명예선양, 국민들의 호국안보의식 고취, 자유 민주주의 수호 및 국가발전에 기여하고자 2001년 설립됐다.

 

참전 유공자회 안보부장의 안내를 받고 감사실에 들어가자 김장현 감사가 온화한 미소로 기자를 맞이했다. 구순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곧은 자세와 또렷한 발성, 기개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전쟁의 아픔을 견디며 꿋꿋이 살아왔던 지난 70여년 인고의 세월도 묻어난 듯 보였다.

 

김 감사의 목에는 현저한 무공(武功)을 세운 군인에게 수여하는 화랑무공훈장이 걸려있었으며 왼쪽 옷깃엔 전장에서 헌신한 공로를 인정하는 뱃지가 달렸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인 김 감사는 호적상으로 1933년생이지만 실제 나이는 이보다 한 살 많은 1932년생이다. 1950년대 당시 중학교 5학년 학생이었던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스스로 자원입대를 했다.

 

김 감사는 "그 당시 중학교 학제가 6년제였는데 당시 5학년이었다.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6.25 사변이 발발했다"면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상황이었고 가족들과 인민군 치하에서 3개월을 숨어서 지냈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렇게 3개월이 지난 9월28일,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고 가족들은 후방(안동)으로 피란갔지만 국가를 위해 싸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스스로 자원입대를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마냥 순탄치 않았다. 입대 지원서를 신청하기 위해 인근 동사무소를 방문했지만 연령에 충족하지 않다는 이유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감사는 이튿날 실제 호적상 나이보다 두 살을 올려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소집이 됐다. 나라가 워낙 혼란스러운 탓에 호적을 대조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는 것이 김 감사의 설명이다.  

 

김 감사는 "그렇게 12월 17일, 국군으로 소집돼 어느 강당에 모였고 대략 1천500~2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90%가 학생복을 입은 어린 소년들이었다"고 말했다.

 

"치열했던 그날의 기억"···양구 최전선 백석산 938고지 탈환 전투 참전

 

새벽 4시, 이들은 서울역으로 이동해 부산 훈련소로 가는 석탄 운반차에 올랐다. 10대의 운반차로 이동했고 한 차에 200명씩 실어 부산까지 가는데만 자그마치 나흘이 걸렸다.

 

김 감사는 "엄동설한과 뚜껑도 없는 운반차에 4박5일간 쪼그려 앉아 이동하고 소금물이 적신 주먹밥을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는다"면서 "그렇게 영동, 대전역을 지나 부산훈련소에 도착후 공병학교로 배치받고 공병·사병 훈련을 1~2주간 받은 뒤 전방 야전공병단 대대(1951.1~1952.7)에 배속돼 사병으로 근무했다"고 밝혔다.

 

이후 8월 갑종 39기생으로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해 6개월 훈련을 받고 1953년 2월28일, 소위로 임관해 7사단 8연대 1중대 1소대장을 맡았다. 당시 중동부 전선의 양구 북방에 있는 백석산에 있었다. 

 

김 감사는 "백석산이 중공군 산하에 있었으며 7사단은 남쪽에 배치돼 있었다"면서 "1953년 7월 정전협정 이전인 6월30일 새벽2시, 상부로부터 공격 명령을 받았고 중공군 제60군 예하 제179사단과 고지쟁탈전을 벌였다. 이 전쟁이 바로 이른바 양구 938고지 전투로도 불리는 선우고지 전투다"고 말했다.

 

당시 소대장을 맡으면서 병사들을 이끌고 앞서 싸우던 초급 장교들을 '소모품 소위'로 불렀다. 이 때문에 갑종장교 출신 소위 70~80%가 전장에서 산화했다. 갑종장교 출신이었던 김 감사도 죽을 뻔한 고비에 놓였다.

 

김 감사는 "우리가 점령하고 있던 938고지를 중공군에 점령당했고 이를 탈환하기 위해 전투를 한 것이다. 우리 병력이 938고지 4부 능선쯤 들어갔을 때쯤 중공군이 던진 방망이 수류탄을 맞아 파편이 왼쪽 팔에 박혔다"면서 "부상을 당해 대구 삼덕국민학교(당시 군병원)에 갔는데 복도고 뭐고 전부 환자들로 북적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다행히 생명엔 큰 지장이 없다는 소견으로 수술은 하지 않았지만 현재까지도 엑스레이를 찍어보면 파편이 들어가있다"고 덧붙였다. 

 

김 감사는 "휴가를 가고 일주일 있다가 병원에 돌아오니 막 정전협정이 체결됐다"면서 "정전 후에도 27년간 재정·군수사령부 등 군생활을 이어갔고 육군 중령으로 예편했다"고 전했다. 

 

다사다난했던 군생활을 예편 후 김 감사는 1970년대 창원기계공업공단 총무부장으로 15년 가까이 근무하며 국내 수출산업 발전에 주춧돌을 마련했다. 

 

참전유공자 명예 수당 월 39만 원···"다소 미흡한 처우 아쉬워"

 

이처럼 북한군의 침략에 맞서 자유를 수호해온 호국 영웅들의 피와 땀이 오늘날의 눈부신 번영과 발전을 이뤘지만 일각에선 그에 상응하는 합리적 수준의 처우가 아쉽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참전유공자에 국‧공립공원 입장료 할인, 보훈‧위탁병원 진료 시 진료비 감면 등의 혜택을 제공한다. 특히 이들에게 지급되는 참전명예수당은 월 39만원, 1년이면 468만원이다. 생계를 유지해나가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배경이다. 

 

 

기자의 이 같은 질문에 대해 김 감사는 "국가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뭐라고 얘기하기 그렇지만 영웅들의 희생과 헌신 가치에 비해 처우가 다소 아쉽다는 데 공감한다"면서 "본인 같은 경우 군생활을 오래해 군인연금이 나와 일상적 생활을 영위하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그렇지 못한 유공자들에겐 물가 등을 감안해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역설했다. 

 

이어 "국가유공자가 대개 1930년생부터 1935년 사이이며 대부분 구순을 훌쩍 넘겼지만 39만원이란 금액으로 과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면서 "국가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걸고 경제 발전을 이끌어낸 유공자들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이 부분은 다시금 재고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정전협정 이후에도 북한의 대남 핵위협, 잇따른 미사일 도발 등이 이어지며 정치권 안팎에선 국내 안보 환경이 매우 엄중해진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그 일례로 남북간 대립 구도가 점차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은 올해 핵어뢰 수중폭발시험과 ICBM 발사 등 무력시위를 선전하고 있다.

 

일련의 내용들과 관련해 김 감사는 물질적인 지상 전략을 구축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안보 의식 제고가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고 강조하며 인터뷰를 끝맺었다. 

 

김 감사는 "올해로 정전협정을 맺은지 70주년이 됐지만 여전히 동북아 안보 정세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정국이다"면서 "이런 점 때문에 제2의 6.25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고취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국가는 철저한 안보 태세 강구, 국민들은 확고한 안보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일보=이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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