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면·짜파게티·너구리·새우깡 등 스테디셀러 제품으로 반세기 넘게 국민 입맛을 책임지고 있는 농심이 내년 60주년을 맞는다. 1965년 설립 이후 올해 59돌을 맞은 농심의 발자취와 창업주 고(故)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의 경영 철학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上) 롯데공업에서 농심까지…도전의 역사와 '희로애락'
(中) '작명왕' 신춘호 회장, 제품 성공의 비결은 '차별화'
(下) "이제는 해외로"…글로벌 식문화 창조기업으로 도약
【 청년일보 】 "매운 라면이니까 辛라면으로 합시다"
고(故)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의 말에 1986년 농심 회의실 안이 술렁거렸다. 참석한 경영진 대부분이 신춘호 회장의 말에 반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제품들은 대부분 회사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아울러 국내에서 한자를 상품명으로 쓴 전례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발음이 편리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으면서도 제품의 속성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네이밍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86년 대부분의 라면이 순한맛이었다. 국내 최초 '매운라면'이라는 제품 컨셉이 명확히 드러나고 한자를 사용해 독특한 분위기와 차별화된 느낌을 줄 수 있는 한 음절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국민 라면' 신(辛)라면이 탄생했다.
◆ 형제간 갈등으로 탄생한 '농심'...봉합은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율촌 신춘호 회장은 1930년 1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태어났다. 5남 5녀중 셋째 아들로 신춘호 회장의 형은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다.
신춘호 회장은 신현주 농심기획 부회장, 신동원 농심 회장, 신동윤 율촌화학 회장, 신동익 메가마트 부회장, 신윤경(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부인)씨 등 3남 2녀를 뒀다.
신춘호 회장은 1958년 대학교 졸업 후 일본에서 성공한 신격호 회장을 도와 제과사업을 시작했으나 1963년부터 독자적인 사업을 모색했다.
신춘호 회장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던 일본에서 쉽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라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신춘호 회장은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하며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형제의 갈등으로 농심이 탄생한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신춘호 회장은 신격호 회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65년 농심의 전신인 롯데공업을 설립하고 라면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두 사람은 감정의 골이 깊어지며 신격호 회장이 롯데 사명(社名)을 쓰지 못하게 하자 신춘호 회장은 1978년 농심으로 사명을 바꿨다. 롯데를 떠나 자신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 뒤로도 50여년간 형제는 인연을 끊고 살았다. 실제로 가족 행사에 두 형제가 동시에 참석하는 일은 없었다. 부친 제사에 신춘호 회장이 불참하는가 하면, 신춘호 회장 칠순에도 신격호 회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신춘호 회장은 2021년 3월 27일 별세했다. 형인 신격호 회장은 이보다 앞서 2020년 1월 19월 세상을 떠났다.
신격호 회장의 장례식장에도 신춘호 회장은 본인 대신 아들인 신동원 농심 회장과 신동윤 율촌화학 회장을 빈소에 보냈다. 신춘호 회장이 별세했을 당시에는 신격호 회장의 아들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조화를 보냈다.
◆ '작명왕'의 탄생…'롯데짜장' 실패에서 얻은 교훈
신춘호 회장은 1965년 라업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나 업계 후발주자라는 한계와 경쟁 심화로 사업이 난관에 처한다.
신춘호 회장이 브랜드의 중요성에 눈을 뜬 것은 1970년 '롯데짜장'의 실패에서 비롯됐다. 유명 조리장을 초빙해 요리법을 배우고 7개월간의 개발 기간을 거쳐 내놓은 국내 최초 짜장라면 '짜장면'은 출시 초기 소위 대박이 났다.
하지만 비슷한 이름으로 급조된 타사 제품의 낮은 품질에, 소비자들은 짜장라면 전체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결국 농심의 짜장면도 사라지게 됐다.
당시 신춘호 회장은 "제품의 품질도 중요하지만 모방할 수 없는 브랜드로 확실한 차별화 전략이 중요하다"고 깨달았다고 한다.
신춘호 회장의 브랜드 철학은 확고했다. 반드시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해야 하며, 제품의 이름은 특성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명쾌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적인 맛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라면쟁이, 스낵쟁이라 부르며 직원들에게도 장인정신을 주문하곤 했다.
신춘호 회장은 회사 설립부터 연구개발 부서를 따로 뒀다. 평소 '다른 것은 몰라도 연구개발 역량 경쟁에서 절대 뒤지지 말라'는 그의 경영 철학 때문이다.
당시 라면산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면 제품 개발이 수월했지만, 농심만의 특징을 담아낼 수도, 나아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안성공장 설립 때에도 신춘호 회장의 고집은 여실히 드러났다. 신춘호 회장은 국물맛에 혁신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 선진국의 제조방식인 턴키를 도입하는 것에 반대하고, 농심이 축적해 온 노하우가 잘 구현될 수 있도록 했다.
신춘호 회장은 브랜드 전문가로도 유명하다. 유기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이나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은 새우깡 등 농심의 역대 히트작품에는 신춘호 회장의 의견이 반영돼 있다.
신춘호 회장의 마지막 작품은 옥수수깡이다. 신춘호 회장은 "원재료를 강조한 새우깡이나, 감자깡, 고구마깡 등이 있고, 이 제품도 다르지 않으니 옥수수깡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후 옥수수깡은 2020년 10월 출시됐고, 품절대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 대표작은 '신라면'…제품 차별화가 '국민 라면'으로 이어져
농심은 짜라게티, 새우깡, 너구리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 제품을 보유하고 있지만 신춘호 회장의 대표작은 역시 신라면으로 꼽힌다.
1983년 안성탕면의 성공을 계기로 신춘호 회장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맛은 소고기의 깊은 맛과 고춧가루의 얼큰한 맛이 조화를 이룬 '매운 맛'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이러한 '매운 맛'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시 상품개발팀은 전국에서 재배되는 모든 품종의 고추를 사들여 '매운 맛'을 실험했다.
개발팀은 전국에서 재배되는 모든 고추 품종을 사들여 하루에도 20번이 넘게 매운 국물을 마시며 스프 개발에 몰두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다데기'에서 비법을 찾았다. 얼큰한 매운 맛을 내는 다데기로 유명한 음식점들을 돌면서 연구한 끝에 고춧가루와 마늘, 생강 등의 재료를 배합한 스프를 개발했다.
아울러 신춘호 회장은 면발도 크게 고민했다고 한다. 이에 연구원들은 쫄깃쫄깃하면서도 부드럽게 넘어가는 면발을 위해 200여 종류를 넘게 만들어 테스트를 했다.
당시의 개발 과정에 참여한 연구원은 "하루에 평균 3봉지 정도의 라면을 매일 먹어가며, 초 시계로 시간을 재고 비커와 온도계로 물의 양과 온도를 정확히 측정해 가면서 맛을 판단해야 했다"며 회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노력 끝에 이전까지 각형으로 된 단면에서 벗어나 얼큰한 국물과 양념이 면에 잘 스며들도록 단면이 둥근 형태의 원형 면을 개발했다.
특히 신춘호 회장이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발음이 편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으면서 제품 속성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네이밍이 중요하다며 임원들을 설득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신춘호 회장은 해외진출 초기부터 신라면의 세계화를 꿈꿨다. '한국시장에서 파는 신라면을 그대로 해외에 가져간다'는 것이다.
한국의 맛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여기에 고급 이미지도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제품인데, 나라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품질에 대한 자신감도 존재했다.
실제로 신라면은 미국시장에서 일본라면보다 대부분 3~4배 비싸다. 월마트 등 미국 주요 유통채널과 주요 정부 시설에 라면 최초로 입점돼 판매 중이다. 중국에서도 한국 특유의 얼큰한 맛으로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실제로 신춘호 회장은 2018년 중국의 인민일보가 신라면을 '중국인이 사랑하는 한국 명품'으로 선정했을 때, 2020년 미국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가 신라면블랙을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선정했을 때 크게 기뻐했다는 후문이다.
농심 관계자는 "신춘호 회장은 한국인에게 익숙한 맛을 라면과 스낵으로 만들어 냈고, 라면은 배고픔을 덜어주는 음식에서 개인의 기호가 반영된 간편식으로 진화했다"며 "농심은 국민들의 삶과 깊숙하게 연결돼 희로애락을 함께 했으며 끊임없는 도전의 역사로 한국을 넘어 세계 시장에서 활약을 이어가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 청년일보=신현숙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