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식량난을 해결하겠다는 큰 목표를 품은 삼양식품 창업주 전중윤 명예회장과 우지 파동·IMF로 위기에 빠진 회사를 반등시킨 김정수 삼양식품 부회장의 경영철학이 사회에 귀감이 되고 있다. 이에 국내 최초 라면인 '삼양라면'부터 글로벌 인기 제품 '불닭볶음면'까지 63년 삼양식품의 발자취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上) "삼양라면에서 불닭볶음면까지"…'우지 파동' 딛고 화려한 '부활'
(中) '라면 신화' 전중윤 회장에서 '불닭볶음면 혁명' 김정수 부회장 '바톤터치'
(下) 제2의 전성기 '신호탄'…'불닭볶음면' 등에 업고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
【 청년일보 】 "국민의 배고픔을 해결하겠습니다"
삼양식품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에서 출발했다. 1950년 6.25 전쟁 후 국민들은 식량난에 처해 있었다.
삼양식품의 창업자인 고(故) 전중윤 명예회장은 1960년대 초 남대문시장에서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장사진을 친 노동자들을 목격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 미군이 버린 음식을 끓여 한 끼를 때우는 비참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해결방안을 모색했고 그렇게 국내 최초 '라면'이 탄생했다.
◆ 전중윤 명예회장, 식량난 해결사 자처…국내 최초 라면 탄생
전중윤 명예회장은 1961년 8월 현재의 삼양식품을 창립했다. 당시 삼양제유로 출발했으나 삼양제유는 같은 해 10월 삼양식품공업으로 상호를 바꿨다. 이후 1990년 삼양식품공업에서 현재의 삼양식품이 됐다.
사명 삼양의 '삼(三)'은 동양철학의 원천이자 우주의 근원인 하늘, 땅, 사람을 상징하는 천·지·인(天·地·人)을 함축했다. 먹을 식(食)을 품고 있는 기를 '양(養)'자에는 사람들에게 풍부한 영양을 공급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삼양'에는 천지자연의 뜻을 헤아리며 굶주린 사람들이 끼니 걱정만은 하지 않기를 바라는 식족평천(食足平天)의 소망이 간절하게 서려 있었다. 식품으로 인간 백세시대를 열겠다는 전중윤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이 담긴 셈이다.
전중윤 명예회장은 창업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다. 이 당시 일본에서는 라면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를 한국식으로 도입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일본의 묘조(明星)식품으로부터 기계와 기술을 도입해 마침내 1963년 9월 15일 국내 최초로 라면을 탄생시켰다.
당시 일본 라면들의 중량은 85그램이었지만, 배고픔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삼양라면은 100그램으로 출시했다.
가격도 꿀꿀이죽이 5원이었던 것을 감안해 많은 사람들이 라면을 먹을 수 있도록 최대한으로 낮춘 10원으로 책정했다. 당시 한국의 물가를 보면 커피 35원, 영화 55원, 대중적인 담배가 25원 수준이었다.
당시 오쿠이 묘조식품 사장은 라면 값을 너무 낮게 정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전중윤 명예회장은 식량난으로 어려운 한국 상황에서 누구나 배부르게 먹으려면 그 정도의 가격을 책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다만 문제는 당시 국민들의 식생활은 오랫동안 쌀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어렵게 만들어낸 라면이었지만 실제 반응은 냉담했다.
하루아침에 식생활을 밀가루로 바꾸기 쉽지 않았고 심지어 라면을 옷감, 실, 플라스틱 등으로 오해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삼양식품 전 직원과 가족들은 직접 극장이나 공원 등에서 무료 시식행사를 열어 라면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삼양라면은 점차 국민들의 입맛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때마침 1965년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 실시한 혼분식(混粉食) 장려운동(쌀밥 대신 잡곡(雜穀)을 섞어먹는 혼식)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아울러 삼양라면은 10원으로 간편하게, 영양 면에서도 부족함이 없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을 발휘하며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63년 첫 라면을 생산한 후 4년째 되는 해부터 판매량은 빠르게 증가했고, 1966년 11월 240만 봉지, 1969년 월 1천500봉지로 급격한 신장을 보였다.
당시 1960년대 매출 신장률 추이를 살펴보면, 해마다 최저 36%에서 최고 254%까지 폭발적인 증가를 기록할 정도로 라면의 인기는 대단했던 셈이다.
삼양식품은 국내에서의 인기에 힘입어 1969년 삼양유업을 세우고 국내 최초로 베트남에 150만달러의 라면을 수출하며 라면의 세계화를 열어갔다.
이후 60여개 나라에 라면을 수출해 대한민국 라면의 우수성을 알리기 시작했고, 1972년에는 동남아지역을 비롯해 수출액이 250만달러를 돌파하기도 했다.
1972년의 기록을 보면 당시 삼양라면의 매출액은 141억원으로 국내 재계순위 23위를 차지했는데, 당시 소비자 가격이 22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약 7억개가 팔린 셈이다.
지금처럼 공장이 자동화 설비를 갖춘 게 아니었기 때문에 7억개라는 숫자를 통해 삼양라면의 인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 우지 파동부터 IMF까지…부도 위기 이후 제2의 전성기 시작
국내 최초 라면 출시 이후 해외사업 확대로 승승장구하던 삼양식품은 1989년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의 위기를 겪는다. 일명 '우지 파동'이다.
1989년 10월 검찰에 삼양식품 등이 식용에 적합하지 않은 '공업용 우지(소기름)'로 라면을 튀긴다'는 투서가 날아들었다.
당시 삼양식품, 오뚜기식품, 삼립유지, 서울하인즈, 부산유지 등 5개의 대표와 경영진들이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입건되기도 했다.
미국 우지협회에서는 등급을 16급까지 구분했는데, 국내에서는 1등급 대비 상대적으로 저렴한 2~3등급 우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 식품 업체들은 우지협회가 정한 식용 우지인 1등급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품위생위반 혐의로 기소된다.
이들은 우지협회에서 정한 비식용 우지임에도 정제과정을 통해 식용할 수 있으며 인체에는 무해하다고 설명했다.
삼양식품 역시 회사 출범 이래 모든 법규를 준수하며 안전한 우지를 수입해 제조했음에도 여론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법적 공방은 8년간 이어졌고 회사는 1997년에 무죄 판결을 받으며 혐의를 벗었다. 당시 서울고등법원은 "미생물 화학적·물리적 위해인자 분석이나 위해평가를 하지도 않고 기소해 인체 위해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회사는 수천억원의 피해를 입고 이미지 또한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당시 시장 점유율이 급락했고 1천여명의 직원들도 회사를 떠났다.
이에 삼양식품은 라면 판매를 잠시 중단하기도 했다. 이 여파로 삼양식품은 1997년 본사를 서울 종로에서 현재 위치인 하월곡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무죄 판결 이후에도 위기는 이어졌다. 1997년 말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이미 우지 파동 이후 누적된 적자로 회사는 부도 위기에 처한다.
전중윤 명예회장과 장남 전인장 삼양식품 회장 등 오너일가는 회사 살리기에 총력을 다했다. 이때 전인장 회장의 아내도 남편의 일을 돕기 위해 주부의 삶을 접고 본격적으로 회사 경영에 뛰어든다. 그가 바로 '불닭볶음면' 신화로 회사를 성공가도에 올린 김정수 삼양식품 부회장이다.
삼양식품은 전세계적인 불닭볶음면 인기로 지난해 매출 1조원 시대를 열었다. 매출액 1조원, 영업이익 1천억원을 넘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이는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이다.
삼양식품의 지난해 매출액, 영업이익, 당기순이익은 각각 1조1천929억원, 1천475억원, 1천266억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각각 31.2%, 63.2%, 57.7% 증가했다.
【 청년일보=신현숙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