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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성장동력 변천사 (中)] "이건희의 결단, 반도체 불모지에서 세계 1위로"…삼성 반도체 신화의 시작

이건희 선대회장, 반도체 정상 궤도 '우뚝'…탁월한 '선구안' 주효
사재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50% 인수…반도체 사업 본격 착수
삼성 반도체, 타의 추종 불허 메모리 반도체 산업 '최강자' 군림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한국 경제는 폐허 상태에 놓였지만, 국민들은 굴하지 않고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기업들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이병철 창업주는 ‘사업보국’이라는 신념 아래 섬유 산업에 뛰어들며 산업의 기초를 다졌고, 이건희 선대회장은 반도체에 과감히 도전해 한국을 ‘반도체 강국’으로 이끌었다. 현재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바이오를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삼고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청년일보는 각 시대의 전환점을 만들어온 삼성의 성장동력 변화를 되짚어본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上) “이병철 회장, 제일모직으로 한국 섬유산업 새 시대 열다”

(中) "이건희의 결단, 반도체 불모지에서 세계 1위로"…삼성 반도체 신화의 시작

(下) “이재용이 키운 삼성 바이오…신수종에서 4조 클럽까지”

 

 

【 청년일보 】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으로 인한 '제1차 오일쇼크'는 전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이 여파 속에서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산업, 즉 하이테크 산업으로의 전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 무렵 이 회장은 파산 위기에 몰린 ‘한국반도체’라는 회사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는 훗날 삼성이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출발점이 된다.

 

당시 삼성 내부에서는 반대 여론이 거셌다.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반도체는 무리다”, “미국과 일본보다 20~30년 뒤처진 상황에서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등의 회의적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재를 들여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어 1977년에는 미국 ICII가 보유한 나머지 50% 지분까지 인수했고, 1978년 3월 ‘삼성반도체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1980년에는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로 통합되며 조직적 기반을 완성했다.

 

사업 초창기 삼성의 반도체 기술력은 미국·일본 선도 기업들과 비교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러한 기술 장벽을 극복하고자 이 회장은 50여 차례 미국 실리콘밸리를 드나들며 핵심 인재 영입을 위한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당시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던 미국의 ‘페어차일드‘를 설득해, 삼성전자 지분 30%를 내주는 조건으로 기술 이전에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3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 체류 중이던 이병철 창업주가 한국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한다. 이른바 ‘도쿄 선언’이다. 이는 삼성 반도체 사업의 본격화를 알린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반면, 해외에선 도쿄 선언 이전까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해외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인텔은 이병철 회장을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웃었고, 일본 기업의 한 연구소는 ▲내수 시장 협소 ▲사회 기반시설 미비 ▲기술력 부족 등을 이유로 ‘삼성이 반도체에 실패할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1983년 미국과 일본에 이어 삼성은 세계에서 3번째로 64K D램을 자체 개발하는데 성공하며 이 같은 의구심을 통쾌하게 뒤엎었다.

 

이 선대회장의 주도로 시작된 삼성 반도체 사업은 이후 ▲1992년 세계 최초 64메가 D램 상용화 ▲1993년 세계 D램 시장 점유율 1위 ▲1994년 256MB D램 ▲1996년 1GB D램 ▲2001년 4GB D램 ▲2010년 30나노(nm) 2GB DDR3 D램 등을 모두 최초로 개발하며 ‘성공 신화‘를 이룩했다. 

 

2022년에는 차세대 기술인 게이트올어라운드(GAA)를 적용한 3나노 공정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고, 지난해 4월에는 업계 최초로 1Tb(테라비트) TLC 9세대 V낸드 양산에 성공했다.

 

또 2023년 9월 개발 발표한 현존 최대 용량 32Gb(기가비트) DDR5 D램은 1983년 64Kb D램과 비교하면 용량이 자그마치 50만배 늘어났다.

 

반도체 부문 매출도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삼성그룹의 캐시카우(현금창출원)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75년 2억원에 불과했던 삼성 반도체 부문 매출은 1986년 1천억원을 넘겼다. 이후 1991년에는 1조원을 달성했으며, 2022년엔 사상 최대액인 98조원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처럼 도쿄 선언은 우리나라 기업사에서 ‘퀀텀 점프(Quantum Jump)‘ 순간 중 하나로 꼽히며, 이를 통해 삼성전자는 30년 넘도록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메모리 반도체 산업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반도체는 수십년 간 수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왔으며, 전체 수출에서 20%가량을 차지한다. 명실상부한 국가 핵심 산업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를 두고 재계 내에선 이 선대회장의 승부사적 기질과 결단력 있는 리더십이 주효했다고 평가한다. 

 

한 재계 관계자는 “1970년대 당시 (첨단산업 불모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때, 이 선대회장이 반도체 사업에 도전장을 내민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이 선대회장의 반도체 사업 낙점은 지금의 대한민국 산업 지형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삼성전자를 명실공히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국가 경쟁력과 안보 강화 차원뿐만 아니라 AI 시대에 접어든 만큼 반도체는 필수불가결한 산업”이라고 강조했다. 

 


【 청년일보=이창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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