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루돌프 슈타이너의 저서 '색채의 본질'에는 저술을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 아닌 스승과 제자들의 살아있는 대화를 옮긴 저서란 설명이 붙어있다.
생기 넘치는 대화체 언어가 문자라는 제도적 규정에 고착되는 순간 본질에 대한 왜곡이나 미묘한 뉘앙스가 사라지는 단점에도 기록을 남기는 이유에 대해 슈타이너의 사상에 대한 생생한 대화체 그대로의 전달이 독자들에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른바 간접체험을 통한 슈타이너와의 대화를 상정한 설명 속에는 시공간을 초월한 주제에 대한 공감을 전제로한 사실의 전달이 기록을 통해 이뤄지기 바라는 마음도 담겨있다.
이른바 영학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 슈타이너의 철학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그가 느낀 감정에 대한 교감이 이뤄지는 것만으로도 기록의 가치는 충분하다는 의미다.
'색채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앞서 우리는 너무나도 제도화된 색인지에 익숙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무는 녹색으로, 바다는 푸른색으로 표현하며 가을의 단풍, 하늘빛을 반사하는 흐린 날의 회색빛 바다라는 맥락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상식이라는 이름의 보편화가 가져온 일종의 제도화 과정이다.
'맥락의 상실'은 슈타이너의 저서에서 나온 우려와 같이 본질이 왜곡되는 현상을 불러올 수도 있다.
윤리적 관점에서 상황을 생각해야할 경우 특히 더 그렇다. 대부분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일종의 제도처럼 작용해 맥락이 무시된 상황에서는 오히려 진실을 가리는 장막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인지적 갈등의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통상적 제도가 제시하는 일종의 가이드 라인을 무시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해소하기 위한 전략으로 제도를 수용하는 것이 보편적이기도 하다. 다만 보편적이지 않은 선택의 과정에서 일종의 두려움이 초래되기도 한다.
생사의 문제와 같은 원초적인 두려움에 대해서는 세계 최초로 거짓말 탐지기와 뇌영상(MRI) 기술을 고안한 안젤로 모소가 이미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생명유지를 위한 혈액순환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임을 관찰과 실험을 통해 증명한 바 있다.
다만 보편적 질서로 자리잡은 제도에 어긋하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게 되는 '인간의 의지'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맥락이 있는 선택의 과정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0일(현지시간) 드리스 판아흐트 네덜란드 전 총리와 부인 외제니 여사가 93세를 일기로 지난 5일 자택에서 동반 안락사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네덜란드에서는 조건을 충족할 경우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어 부부의 동반 안락사를 전달한 기사로 읽힐 수 있다.
다만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며 2021년 변호사 출신의 판아흐트 전 총리가 정계 입문에서부터 몸 담아온 기독민주당(CDU)의 이스라엘 정책에 비판을 쏟아내며 탈당하게 된 맥락을 살핀다면 조금 더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동갑내기인 판아흐트 전 총리 부부가 함께한 70년의 세월 속에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 속에 담긴 공감과 주고 받은 눈빛 속에 담긴 교감의 의미를 우리는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 청년일보=전화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