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삼성전자 사내 최대 노동조합인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이 사측과의 잇따른 임금협상 파행 이후 4주간 대대적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에 삼성전자가 최대 위기에 봉착했지만 노조가 총파업을 종료하고 현업에 복귀하기로 하며 한시름 놓게 됐다. 다만, 파업 종료가 아닌 게릴라 파업 등으로 임금 교섭을 위한 쟁의활동을 이어가겠다고 밝혀 노사갈등이 지속될 여지를 남겨뒀다. 청년일보는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쏘아 올린 '반도체 신화'를 재조명하고 노사갈등이 경제적으로 끼치는 영향과 전삼노의 행보를 되짚어봤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上) "초일류 기업 명성에 흠집"…전삼노 총파업에 사측 '진땀'
(中) "평균 연봉 1억 넘는데"…재계 "전삼노 파업, 국민 눈높이와 괴리"
(下) "총파업 종료했지만"…장기 투쟁 예고에 노사 갈등 지속 우려
【 청년일보 】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은 첨단산업의 불모지였던 한국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우뚝 성장시킨 장본인으로 오늘날까지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는 반도체 사업 진출에 대한 과감한 결단력과 승부수가 주효했기 때문이다. 1973년 당시 '제1차 오일쇼크'에 직면하면서 이 선대회장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 산업에 진출해야겠다는 뜻이 확고했다.
때마침 이 선대회장은 1974년 우리나라 최초의 반도체 업체인 '한국반도체'가 파산 직전이라는 소식을 듣고, 부친인 이병철 회장에게 반도체 사업 진출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인수를 건의했다.
그러나 경영진들 사이에선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이나 일본보다 20, 30년 뒤처졌는데, 따라가기나 하겠는가?"는 등의 의구심이 제기됐다. 하지만 이 선대회장은 사재를 털어서까지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하는 과감함을 보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7년 12월, 미국 ICII사(社)가 가지고 있던 나머지 지분 50%도 인수했고, 이듬해 3월 상호를 '삼성반도체주식회사'로 변경했다. 1980년 1월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로 흡수 합병됐다.
사업 초기에는 미국, 일본 등 해외 업체들에 비해 기술이 부족했고 장벽을 뛰어넘기 어려웠던 현실이었지만 미국 실리콘밸리 등을 50여 차례나 드나들며 우수 인재들을 확보했다.
특히 당시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던 미국 페어차일드사(社)를 설득, 삼성전자 지분 30%를 내주는 조건으로 기술 이전에도 성공했다.
이후 1983년 8월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 ▲1993년 전세계 D램 시장 점유율 1위 기록 ▲1994년 256Mb D램 개발 ▲1996년 1G D램도 개발하며 삼성 '반도체 신화'를 써내려 갔다.
이 선대회장의 '뚝심'으로 삼성전자는 초일류 기업이란 타이틀을 유지해 왔으나 굴곡을 겪기도 했다. 지난해 초부터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반도체 수요 부진으로 인한 한파를 면치 못했고,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은 당해 적자 규모만 15조원 가까이 기록했다.
올해의 경우 AI(인공지능) 메모리 반도체 수요 증가에 힘입어 예전 명성을 되찾겠다는 구상이지만 최근 거대한 암초에 봉착했다.
삼성전자 사내 최대 노조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이하 전삼노)이 올 초부터 사측과의 임금협상 엇박자로 지난 1969년 창립 이래 첫 파업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2019년 11월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산하 노조로 출범한 전삼노는 DS 부문 구성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지난달 31일 기준, 전체 조합원 수는 3만6천여명을 넘었다.
지난 5월 말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파업 선언을 공언한 전삼노는 '집단적 연차' 소진 방식의 첫 파업을 진행하고, 7월 초 창사 이래 첫 총파업에 돌입했다.
전삼노는 4주 이상 총파업을 진행하던 중 사측이 납득할 만한 협상안을 제시할 것을 조건으로 지난달 29일부터 31일까지 사흘간 '끝장 교섭'을 진행했지만 끝내 절충점을 찾지 못해 결렬됐다.
【 청년일보=이창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