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중국이 반도체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2015년이다. 초기 투자 규모만 1600억 달러. 이의 일환으로 중국 최대 반도체 기업인 칭화유니그룹은 그 해 미국의 최대 D램 기업인 마이크론 인수를 추진했다. 물론 이 같은 시도는 미국 의회의 반대로 실패했다.
하지만 중국은 자국 내 반도체 기업 합병과 미국 현지투자 확대, 그리고 유럽 반도체 기업 인수에 나서는 등 반도체 굴기(崛起)를 지속하고 있다. 굴기란 산처럼 우뚝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난 2004년 이후 중국의 정치적 슬로건, 즉 '깃발'로 사용되고 있다.
특정 사상을 뚜렷하게 내세우는 태도나 주장을 의미하는 깃발은 중국을 이해하는 키워드다. 1970년대 중국의 깃발은 흑묘백묘(黑猫白猫)였다. 경제 개발이 시급했던 상황에 맞게 검든, 희든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1980년대는 도광양회(韜光養晦)다. 칼날의 빛을 감추고, 그뭄의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은 미국과 함께 G2의 반열에 오르는 기반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이제는 굴기라는 깃발을 내걸고 아예 본격적인 패권경쟁에 나선 상태다.
지금 중국은 온통 굴기의 나라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집권 이후 가속도가 붙어 반도체는 물론 인공지능(AI)·빅데이터·우주개발에 이르기까지 굴기를 내세우고 있다. 미국에게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역시 '맞불'에 나선 이유다. 미국 내에 초당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는 얘기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지난 2016년 12월 중국의 푸젠그랜드칩(FGC)이 독일 아익스트론의 미국 자회사 인수합병(M&A)에 나서자 이를 포기하도록 행정명령을 내렸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아예 규제의 타킷으로 삼았다. 중국의 전략이 미국의 경제는 물론 군사적으로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은 퇴임을 이틀 남긴 상황에서도 화웨이에 반도체 칩을 납품하는 인텔 등 공급사들에게 납품 허가 취소를 통보할 정도였다.
중국과의 반도체 전쟁은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12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화상회의'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날 미국 상ㆍ하원 의원 65명에게 반도체 산업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받았다면서 "중국 공산당이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고 지배하려는 공격적 계획을 갖고 있다"는 서한 내용을 소개했다.
'백악관 미팅'으로도 불리는 이번 반도체 화상회의는 미국 내 반도체 공급망의 복원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반도체 칩 공급이 지연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ㆍ가전ㆍ스마트폰 등의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국내 기업 중 유일하게 반도체 화상회의에 초청받았다. 대만의 TSMC와 함께 글로벌 반도체 칩(파운드리)의 70%를 공급하고 있는데다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반도체 공장을 운영중인 것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약 19조원을 투자해 미국에 새로운 반도체 칩 공장 증설을 계획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해 12월 오스틴 공장 인근에 매입해 둔 부지에 대한 용도 변경을 마쳤다. 또한 오스틴 외에도 여러 후보지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바이든 정부가 반도체 칩 생산과 일자리 창출을 요구하면서도 투자를 유인할 세제 혜택, 보조금, 연구개발(R&D) 등을 지원해 줄 것이란 기대도 하고 있는 상태다.
문제는 백악관 미팅 이후 신규 투자 등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나올 경우 중국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한국ㆍ미국ㆍ중국에 효율적으로 분산된 생산 기반을 거점으로 '반도체 거인'으로 성장해 왔다.
실제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西安)과 쑤저우(蘇州)에 낸드플래시 공장과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보유하고 있다. 또 올해 중국 시안 2공장이 본격 가동을 앞두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지난해 반도체 생산과 판매를 통해 중국에서 올린 매출이 31조원에 달한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문(DS)이 거둔 매출 103조원의 3분의 1이 중국에서 나온 것이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하면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분위기의 백악관 미팅은 딜레마일 수 밖에 없다.
딜레마는 두 가지 판단 사이에 끼어 어느 쪽도 결정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한다. 진퇴양난이라는 의미다. 이의 해결은 흔히 선장(船長)으로 비유되는 그룹 총수(總帥)의 몫인 경우가 많다. 신속하고 과감한 결정은 결국 오너의 판단이 동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이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선거공판에서 2년 6개월의 실형을 받고 법정구속되면서 총수 부재라는 리스크에 직면한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진출 선언(198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1993년), 스마트폰 진출(2008년)처럼 고비 때마다 오너의 결단으로 돌파해 왔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마누라,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는 말이 상징하듯 삼성 신경영의 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중 반도체 전쟁의 최전선에 내몰린 삼성전자는 절체절명의 위기 한 가운데 서 있는지도 모른다. "총수 부재와 사법 리스크, 그리고 정치 권력의 발목 잡기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삼성전자의 글로벌 톱 대열 탈락은 시간 문제"라는 한 재계 관계자의 발언이 새삼스럽게 와 닿는 상황이다.
【 청년일보 = 정구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