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정보의 격차가 존재하는 시장에서는 도리어 품질이 낮은 상품이 선택되는 왜곡 현상이 벌어진다. 이를 역선택(逆選擇)이라고 한다.
역선택은 보험시장에서 자주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보험사고의 발생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보험에 가입하려고 하기 때문에 보험회사는 보험금을 지급할 확률이 높은 사람과 계약할 가능성이 높다.
실례를 보자. 보험사고의 발생 가능성이 낮은 사람은 자신을 사고율이 낮은 가입자로 취급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보험회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가입자를 식별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가입자별로 보험료에 차등을 두지 못하고 일률적인 평균 보험료를 제시하게 된다.
이 경우 보험사고의 발생 가능성이 낮은 사람은 보험시장에서 퇴장하게 되고, 보험사고의 발생 가능성이 높은 사람만 남게 된다.
중고차 시장도 마찬가지. 판매자는 구매자에 비해 해당 차량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갖고 있다. 이에 결점 많은 중고차 판매자는 이미 정해진 가격에 만족하기 때문에 시장에 내놓지만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중고차 판매자는 시장에 내놓지 않으려고 한다.
결과적으로 시장에는 결점 많은 중고차가 더 많아지기 때문에 구매자는 상태가 괜찮은 중고차보다는 결점 많은 중고차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를 흔히 '개살구 시장'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개살구란 빛 좋은 개살구처럼 겉만 멀쩡한 물건을 의미한다.
역선택은 정치에서도 나타난다. A당 지지층이 B당의 경선에 참여해 본선 경쟁력이 낮은 후보를 택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본선에서 A당 후보가 B당의 '강한 후보' 대신 '약한 후보'를 만나도록 하는 것이다.
국민의힘 내 역선택 논란은 지난달 30일 한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면서 점화됐다. TBS 의뢰로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조사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홍준표 후보가 범보수권의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에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따라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 조사에서는 홍준표 후보가 광주/전라 지역에서 윤석열 전 총장에 14.2%포인트나 앞선 것으로 나오면서 역선택 효과라는 관측이 나왔다.
윤석열 전 총장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당 선거관리위원회에 역선택 방지 조항 도입을 촉구했다. 반면 홍준표 후보는 "호남 지지율이 올라가니 이젠 역선택 운운하며 경선 여론조사에서 호남을 제외하자고 하는 못된 사람들이 있다"고 받아쳤다.
전문가들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역선택 논란에 대해 발생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는 대선후보 지지 여부를 먼저 묻고, 정당 지지도를 질문 항목의 마지막에 배치하는 만큼 역선택이 작용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정당 지지도를 먼저 물어 걸러낸 다음 대선후보 지지 여부를 묻는 방식이 아닌 만큼 더불어민주당 지지층 가운데 역선택을 시도하는 응답자를 가려낼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여론조사를 두고 조직적으로 역선택을 시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단 여론조사가 시작되면 지지층 단톡방에 관련 정보가 공유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준표·유승민·하태경·안상수·박찬주 후보 등 대선주자 5인은 지난 5일 정홍원 선거관리위원장을 향해 역선택 방지 조항이 포함되지 않은 경선준비위원회 원안을 그대로 확정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경선 일정을 중단하고, 공정경선 서약식을 포함해 선거관리위원회의 모든 일정 또한 보이콧하겠다고 압박했다. 일종의 '무력시위'인 셈이다.
정홍원 위원장은 국무총리를 포함한 다양한 공직을 거쳤다. 하지만 선출직 경력은 없다. 직업 정치인이 아닌 관료 출신이라는 얘기다. 뒤탈 없는 결정을 중시하는 관료 출신의 특성상 목소리를 크게 내며 압박하면 역선택 방지 조항 도입과 같은 과감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탈이 났다. 공정경선 서약식 직전에 정홍원 위원장이 사의를 표명하고 예비경선 후보 4명은 불참했다. 정홍원 위원장은 이준석 대표의 만류로 사퇴 의사를 접었지만 해프닝으로 보기에는 상황이 심각하다. 대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왔는데, 제1야당의 경선이 시작도 하기 전에 파행을 겪고 있는 것이다.
예비경선 참여자 12명 가운데 5명이 보이콧 움직임에 가세한데다 최재형 전 원장조차 경선준비위원회 원안 유지로 입장을 선회하면서 결국 역선택 방지 조항 도입은 무산됐다. 대신 1차 예비경선에 당원 여론조사 비율을 20% 반영하고, 본경선 국민 여론조사에 '본선 경쟁력' 측정 방식을 도입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이달 13~14일 진행되는 1차 예비경선 여론조사는 기존 국민 여론조사 100%에서 국민 여론조사 80%와 당원 여론조사 20%로 조정됐다. 국민의힘은 15일 1차 예비경선 통과자 8명을 발표한다.
2차 예비경선은 다음달 8일 국민 여론조사 70%, 당원 투표 30%를 통해 후보를 4명으로 압축한다. 최종 후보를 결정하는 본경선은 11월 5일 실시된다. 국민 여론조사 50%, 당원 투표 50%로 치르되 국민 여론조사의 경우 본선 경쟁력을 측정해 반영하게 된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이처럼 절충안을 제시하면서 역선택 방지 조항 도입 여부를 둘러싼 내홍은 일단 '봉합' 국면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선 경쟁력을 측정하는 여론조사 설계 과정에서 대선주자들이 충돌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원래 경선 룰 결정 권한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있다. 그런데도 위임기구일 뿐인 경선준비위원회가 역선택 방지 조항을 도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정했고, 최고위원회의 추인까지 받았다. 홍준표·유승민 후보가 “이미 정해진 경선 룰을 다시 논의한다는 자체가 경선을 깨자는 것”이라고 주장할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이준석 대표 책임론이 나오는 이유다.
정당정치는 선거를 통해 정권획득과 정권교체를 추구한다. 본선 경쟁력은 이를 위한 확실한 교두보다. 이를 외면하는 것은 자기 발등을 찍는 자충수(自充手)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국민의힘 대선주자들은 눈앞의 유불리만 따지면서 진흙탕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일부 후보는 '내부 총질'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역선택을 방지할 수 있는 조항은 유의미하다. 빛 좋은 개살구처럼 실질 경쟁력이 낮은 '불량 후보'를 걸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선거관리위원회가 제시한 절충안이 얼마 만큼 역선택 리스크를 제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만 '가짜 지지율'을 내세워 자신을 정권교체의 적임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黨)은 물론 나라에도 해악을 끼치는 일이다.
【 청년일보=정구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