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업체 애플의 공동 창업주 스티브 잡스는 1955년 생이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942년 생이다. 나이만 보면 세대 차이를 느낄 수 있지만 이들은 작고한 이후에도 여전히 글로벌 IT업계의 두 거두(巨頭)로 회자되고 있다. 특히 이들의 리더십은 비교 대상으로 자주 거론된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컴퓨터를 만들면서부터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장에 소개하는 역할을 해왔다. 애플, 맥킨토시, 3D 영화, 아이팟, 아이폰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마우스, MP3 플레이어, 터치 스크린 핸드폰, 태블릿 PC 등 그의 작품은 아니지만 이를 상용화 또는 보편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삼성은 반도체, 핸드폰, LCD, 김치냉장고 등 어느 것 하나 먼저 발명해 내놓은 상품은 없다. 하지만 성공할 것으로 보이는 상품의 가치를 일찍 꿰뚫어 더욱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 냄으로써 글로벌 시장의 경쟁력을 높여 나갔다. 이를 진두지휘해 나간 사람이 이건희 회장이다.
스티브 잡스는 강력한 비전과 함께 새로운 시장을 자극할 능력을 갖춘 경영자로 평가받는다. 자신이 상상한 무엇인가를 머리 속에서 구체화하고, 결과로 가시화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천재'라는 말이 따라붙는 이유다.
또한 스티브 잡스는 기술을 사랑하고, 마케팅에도 수완을 발휘한 경영자로 꼽힌다. 엔지니어들은 기술에 대한 애정은 물론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바꿔 주는 경영자를 존경하게 마련이다. 이것이 스티브 잡스의 리더십인 셈이다.
이건희 회장을 천재라고 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그는 탁월한 얼리어답터다. 특히 시장을 바라보는 눈이 넓으면서 정확하다. 더구나 천재의 유용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경영자 가운데 한 명이다. "10만명을 먹여살릴 천재가 필요하다"는 천재 경영론이 대표적이다.
삼성의 성공 배경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이 경쟁 우위에 있는 경영 자산의 적절한 활용이다. 고도화된 자본, '관리의 삼성'이란 말이 나올 만큼 잘 훈련된 조직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는 일본 기업에서도 발견된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얘기다. 바로 빠르고 정밀한 소통 구조, 즉 '결단'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총수(總帥) 리더십이다.
실제 삼성이 오늘날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1위를 달리고 있는 비결 중 하나가 총수 리더십이라는 평가가 있다. 리더십 DNA를 구분하자면 미국에 스티브 잡스의 천재 리더십, 그리고 한국에는 이건희 회장의 총수 리더십이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성공 신화를 이끈 권오현 상임고문은 지난해 7월 사내 방송을 통해 '미래를 향한 끊임없는 도전'이라는 제하의 인터뷰를 가졌다. 이날 인터뷰는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 시제품을 생산한 1992년 8월 1일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
권오현 고문은 일본과 기술 격차를 벌리며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경쟁력은 총수 리더십에 있었다고 강조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모험을 감수하며 적기에 투자를 단행한 까닭에 시장의 흐름을 만드는 '퍼스트 무버'가 됐다는 것이다.
권오현 고문은 "당시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 같은 일이었다"며 "이병철 회장께서 반도체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이후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건희 회장이 지속적인 투자를 해서 동력이 됐다"고 회상했다.
권오현 고문은 "반도체 사업은 워낙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빠르고 투자 규모도 커서 위험 부담이 있는 사업인데, 위험한 순간마다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의사 결정이 성공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어 "1990년대 일본의 반도체 기술 수준이 높았지만 이후 '잃어버린 10년'이 됐다. 일본은 100% 전문 경영인 시스템이라 빠른 결정을 못했고, 불황기에 (전문 경영인이) 투자하자는 말을 못해서 투자 시점을 잘 결정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시장을 주도하기 위해서도 총수의 강력한 리더십이 뒷받침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오현 고문은 이재용 부회장이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오르겠다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한 것을 언급하며 "과거 경험에 비춰보면 어려운 시기일수록 제일 중요한 것은 강력한 리더십"이라고 강조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부친의 와병 중에 그룹 경영을 이끌면서 혁신을 통해 그룹 문화와 경영 방식을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총수 리더십의 진화인 셈이다.
옵티멀(optimal) 경영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최적의 사업구조를 추구해 경영 효율을 극대화 하는 것이다. 세계 일등과 이등 사업만 남기고, 나머지는 매각하거나 합병한다는 전략이 두드러진다. 1990년대 제너럴일렉트릭(GE)의 명장 잭 웰치 회장의 경영 철학과 유사하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이 세계 1등으로 육성할 수 없는 사업이라면 삼성이 최고의 주인이 아니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해당 사업을 더욱 잘 키울 수 있는 기업을 찾아주는 것이 삼성에도 좋고, 해당 기업에도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서로가 윈-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실용적 사고가 뚜렷하다. 이 역시 총수 리더십에서 나올 수 있는 결단의 산물로 보여진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삼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올해 1분기 삼성전자의 반도체 실적이 외형과 수익 면에서 모두 글로벌 경쟁사들에게 뒤처진 것으로 나타나면서 이 같은 위기론은 더욱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반도체 부문에서 매출 19조원, 영업이익 3조370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1분기 대비 매출은 8% 가까이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16% 감소했다. 올해 반도체 슈퍼 사이클(장기 호황)이 예고된 것을 감안하면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이다.
반면 대만의 TSMC는 역대급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1분기 매출은 129억 달러(14조5000억원), 영업이익은 53억6000만 달러(6조원)로 모두 사상 최고다. 삼성전자보다 매출은 4조원 이상 적은데, 영업이익은 2배 가까이 높은 것이다.
반도체 공룡 인텔도 매출 197억 달러(22조1000억원), 영업이익 37억 달러(4조1000억원)를 기록하며 삼성전자를 앞질렀다. 지난해까지 삼성전자가 인텔에 매출은 뒤져도 영업이익은 앞섰는데, 올해는 영업이익에서도 추월당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전 세계의 반도체 패권 경쟁 여파로 TSMC와 인텔이 '쩐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대대적 투자에 나서고 있는 반면 삼성전자는 총수 부재 리스크로 적극적인 대응에 한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과 투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총수의 결단이다. 그런데 사법 리스크가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 10~12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赦免)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64%였다. '반대한다'는 27%였고, '모름·무응답'은 9%였다. 데이터리서치(DRC) 여론조사에서는 71.2%가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에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여론이 우호적인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사실상 국정농단 사태의 피해자인 측면, 그리고 이건희 회장 유족의 미술품 및 의료 기부 등 사회 환원이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삼성전자가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전략적 투자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재용 부회장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호승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 25일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에 대해 "경제계나 종교계, 외국인 투자기업들로부터 그런 건의서를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에 대해서는 경제적 측면 뿐만 아니라 국민적인 정서라든지 공감대 등도 함께 고려해야 되기 때문에 별도 고려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청와대는 이재용 부회장 사면에 대해 "검토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가 "국민 여론을 살필 것"이라고 사뭇 분위기가 다른 답변을 내놓은 바 있다. 특히 이호승 실장이 "별도 고려가 있을 것"이라는 한 단계 진일보한 언급을 했다는 점에서 한층 기대감을 갖게 하고 있다.
당초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뇌물·횡령 등 중대 범죄에 대해서는 사면권을 제한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하지만 일련의 청와대 언급을 보면 이재용 부회장 사면에 대한 핵심층의 기류가 바뀌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여권 내에서도 사면 촉구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20일 "(이재용 부회장이) 반도체 부분과 백신 부분에서 좀 더 미국의 요청이 있고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사면도 긍정적으로 검토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국 청와대와 여당의 기류는 '국민 공감대'가 형성되면 검토해 볼 수 있다는 입장으로 읽힌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올해 초 발간한 공저 '기로에 선 한국 경제'에서 "탁상공론이나 이념을 배제하고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한국 경제의 지속적 성장 방안을 고심했다"고 밝혔다. 김부겸 총리는 특히 "무엇이 한국 기업들로 하여금 투자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다시 경쟁력을 잃어 가는 악순환에 들어가도록 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눅 든 기업의 사기를 진작하고 투자와 혁신을 북돋을 수 있는 언급인데, 이 같은 지향성 역시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시각이 있다. 특히 국민 공감대를 사면 조건으로 삼는다면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은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나온다. 국민 여론은 사면 찬성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일부 사면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법의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는 특별사면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거나 협소한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의 특별사면은 그 자체가 법의 형평성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의 형평성을 이유로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이 안 된다면 대통령의 '사면 권력'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사면을 위해서는 법무장관이 사면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대통령에게 상신해야 한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대통령의 몫이다. 미국 대통령들은 위기의 순간에 지지세력, 즉 당파의 이익은 물론 자신의 신념까지 바꾸면서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우선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것이야 말로 정치 지도자의 용기이자 리더십이다.
스티브 잡스의 리더십은 오늘날의 애플을 만들었다. 쌍벽을 이루는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은 삼성을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올려 놓은 기반이 됐다. 그리고 이재용 부회장의 리더십은 미래의 삼성을 위한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민 역시 이 같은 이재용 부회장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의 위기 탈출을 염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대통령의 대승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 청년일보=정구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