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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정치적 감성'의 편향된 노동정책으로 곪아가는 서민 경제

양대 지침 폐지,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제, 비정규직 제로화 부작용 양산
'저녁이 있는 삶'은 메타포···노사·노노 갈등은 서민의 작은 밥그릇마저 위협

 

【 청년일보 】 '저녁이 있는 삶'은 지난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던 손학규 당시 상임고문의

대선(大選) 슬로건이다. 그 때는 물론 지금도 우리나라 대선 역사상 가장 멋진 슬로건의 하나로 꼽힌다. 

 

물론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유명한 대선 슬로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변화, 우리는 할 수 있다(Change. Yes We Can)'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은유적 표현이지만 당시의 묵직한 시대적 과제를 담고 있었다. 장시간 노동, 가족해체, 과도한 사교육비, 청년실업, 양극화 해소 등 우리 사회가 가장 풀기 힘든 문제들을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빨리'만 외쳤던 압축성장의 폐해에 대한 자성의 의미도 담겨 있다.

 

당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으로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도 이 슬로건을 부러워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손학규 고문의 저녁이 있는 삶이란 슬로건은 정말 좋다. 제가 나중에 대선후보가 되면 손 고문에게 그 슬로건 좀 빌려쓰겠다고 요청드리겠다"고 말했다. 

 

저녁이 있는 삶이 그렇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낼 줄은 손학규 고문도 몰랐다고 한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한 달 전만해도 슬로건은 '정의로운 민생정부, 함께 잘사는 나라'였다. 그런데 모범답안 같은 이 슬로건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손학규 고문은 1년 전 당대표 시절 노동정책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나왔던 방송용 멘트를 생각해 냈다. '저녁이 있는 삶, 주말이 있는 삶, 휴가가 있는 삶’이란 슬로건을 다시 소환한 것이다. 국내 최고를 자처하는 홍보 전문가들이 투입된 대선 후보들의 슬로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저녁이 있는 삶은 방송 원고를 담당한 비서관의 작품이라고 한다.

 

인간의 삶은 다면적이고, 사회 구조는 복잡하며, 노동의 작동방식 역시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고 있다. 노사(勞使)나 노노(勞勞) 사이의 이해관계가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면밀한 분석과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진보진영 노동정책의 슬로건처럼 떠받들어지는 저녁이 있는 삶은 방송용 멘트, 즉 '정치적 감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민주당계 정권인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친노동 못지 않게 친기업 정책에도 무게를 실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친노동, 그리고 노조(勞組)에 지나치게 편향돼 있다. 저성과자 해고 기준과 취업 규칙 변경 기준 완화 등 이른바 양대(兩大) 지침의 폐기가 대표적이다. 

 

양대 지침의 핵심 내용은 업무 성과가 낮은 근로자에 대한 해고를 허용하고, 근로자에게 불리한 취업 규칙을 도입할 때 노동조합의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되도록 한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가운데 28위에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 문제를 개선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를 위해 도입된 것이지만 문재인 정부는 출범 즉시 이를 폐지했다.

 

양대 지침의 폐기는 경직된 노동시장을 고착화하고, 노동생산성을 더욱 낮게 만들어 경제를 벼랑으로 몰고 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청년실업의 심화를 부채질했다. 어느 정도 해고가 이루어져야 취업도 가능하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인데, 양대 지침 폐기는 청년 일자리를 더욱 옥죄는 결과를 가져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대선을 앞두고 '2020년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발표했다. 분배는 물론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며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을 간판 정책으로 내세운 것이다. 당시 최저임금은 6470원이었다. 

 

일반적으로 정부가 개입해 임금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면 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한다는 사회적 목표를 위해 시장 왜곡을 어느 정도 용인한다는 것이 최저임금 정책의 존재 이유다. 문제는 노동생산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급격한 인상이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은 자영업자 및 중소기업에 인건비 부담으로 다가오며, 이는 고용 축소 및 물가상승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결국 근로자에게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다. 실제 문재인 정부가 최저임금을 7530원으로 16.4% 올린 2018년 5인 미만 영세 사업장의 일자리는 24만개나 줄었다. 전년 대비 실업급여 신청도 32% 증가했다. 과도한 최저임금 상승의 부작용이 곧장 나타난 것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최근 최남석 전북대 교수에게 의뢰해 진행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시나리오별 고용 규모' 보고서에 따르면 최저임금이 내년에 1만원이 될 경우 최소 12만5000개에서 최대 30만4000개까지 일자리가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근로자의 소득이 늘어나고, 이는 소비를 자극해 경제가 성장한다면서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일관되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에 부담을 느낀 고용주들이 종업원을 내보내고, 그 영향으로 근로자의 소득이 감소하는 역효과만 낳았다. 최저임금을 과속으로 인상하기보다 기업 투자를 이끌어내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준 것이다.

 

근로자 삶의 질을 높여주겠다며 시행한 주(週) 52시간제 역시 문제다. 다음 달부터 종업원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에도 주 52시간제가 적용되는데, 서민의 작은 밥그릇마저 깨는 역설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경제는 낙후된 부문과 선진적 부문간 격차가 커서 어디를 주목하느냐에 따라 진단이 달라질 수 있다. 생산성이 높은 대기업도 있지만 자영업자와 영세 중소기업처럼 저생산성 부문도 다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영업자와 영세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유예 기간도 충분히 주지 않고 주 52시간제를 준수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사업을 접으라는 것과 같을 수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50인 미만 업체 네 곳 중 한 곳은 아직 주 52시간제를 이행할 준비가 안돼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설문조사도 같은 기조다. 주조, 금형, 용접 등 뿌리산업과 조선 분야의 중소기업 상당수는 주 52시간제가 적용되면 폐업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반면 주 52시간제로 임금 감소를 우려하는 종업원들은 '투잡'을 찾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시간 축소와 임금 감소는 같이 붙어다니는 문제다.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택배 노조의 파업도 본질적 문제는 이것이다. 택배기사 과로사로 불거진 파업은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임금 보전은 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분위기다. 택배 물량이 줄면 택배기사의 수입도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노조는 지금까지 물량 감소분에 따른 임금 보전을 요구해 왔다. 

 

최종 합의 여부는 우체국 등 공공부문 타결에 달려 있는 상태다. 우체국 등 공공부문에서는 택배기사의 반복된 파업으로 택배기사와 집배원간 노노 갈등이 빚어지면서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 우정사업본부는 아예 택배사업을 접겠다면서 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노노 갈등은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조가 충돌하자 공단 이사장이 단식 농성에 들어가는 황당한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공공기관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노노 갈등이 적지 않았는데, 이는 무리한 비정규직 제로화 정책이 낳은 산물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비정규직 노조는 국민연금공단·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의 형평을 들어 자신들을 정규직으로 직고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정규직 노조는 이를 공정의 탈을 쓴 역차별이라고 반대한다. 신(神)도 탐낸다는 공공기관에 어렵게 들어왔는데, 비정규직들이 '무임승차'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논리다.

 

같은 장소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기능과 역할을 무시한 채 무조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문제다. 특히노조간 밥그릇 싸움이 이어지다 보면 결국 청년층의 취업 기회를 박탈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기존 직원과 취업 준비생 등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고용을 강제하고, 휴일을 늘리며, 사회 부담을 확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와중에 노사는 물론 노노 갈등 역시 극대화되고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은 말 그대로 '메타포'다. '정치적 감성'을 내세워 편향된 노동정책을 밀어붙이면 서민 경제는 곪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정권교체 외에는 답이 없다는 얘기다. 

 

【 청년일보=정구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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