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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묻고 더블로 가는' 막장 공약 경쟁···시민의식이 '보루'

내년 3월 대선 앞두고 벌써부터 '메가톤급' 포퓰리즘 공약 난무
대증적 포퓰리즘 대신 현실성·실효성 있는 공약에 관심 가져야

 

【 청년일보 】 막걸리에는 추억이 담겨 있다. 술을 받아 오라는 어른들의 심부름에 낑낑대며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 다녔던 추억은 나이 먹은 세대에겐 아직도 살아 숨쉰다. 고무신도 마찬가지. 산업화가 궤도에 올라 운동화나 구두를 신을 때까지 고무신은 '국민 신발'이었다.

 

이 같은 추억에는 '보릿고개'와 함께 선거에 나선 후보자가 주는 막걸리 한잔, 고무신 한 켤레가 따라 나온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후반까지 기승을 부린 막걸리·고무신 선거다. 선거가 매수(買收)로 얼룩진 흑역사다. 흑역사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막걸리와 고무신에서 현금 봉투를 거쳐 이제는 교묘한 포퓰리즘으로 진화하고 있다. 

 

물론 다른 것은 있다. 과거에는 주는 후보자도, 받는 유권자도 쉬쉬했다. 부끄러움을 알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공약(公約)이라는 이름으로 뻔뻔하게 대놓고 한다. 관권선거, 금권선거가 대표적이다. 관권선거와 금권선거가 조합을 이루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대부분 선심성 공약의 형태로 나타난다.

 

4·7 재보궐선거를 41일 앞둔 지난 2월 25일. 문재인 대통령은 부산의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찾아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이는 같은 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처리된 가덕도신공항특별법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가덕도신공항특별법은 다음 날 본회의를 최종 통과했다. 지난해 11월 발의된 지 3개월 만에 '패스트 트랙'으로 처리된 것이다.

 

앞서 소관 부처인 국토교통부는 물론 기획재정부와 법무부는 법안 심사 과정에서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하는 것은 적법성과 형평성에 문제가 있고, 공사비용 역시 28조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논란이 되자 이들 부처는 곧바로 반대의 뜻은 아니라고 밝혔다. 꼬리를 내렸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동안 정치권에서 지역 선심성으로 만들거나 늘려 놓은 공항은 대부분 실패했다. 무안국제공항, 양양국제공항, 예천공항, 울진공항은 '햇볕에 고추 말리는 공항' 또는 '유령 공항'이라고 불리며 세금 낭비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가덕도 신공항은 내년 3월 9일 치러지는 차기 대선에까지 지역 선심성 공약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 5일 운동권 출신의 김영환 전 의원은 "문 대통령은 가덕도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실까?'라며 돌직구를 던졌다. 그러면서 이는 가덕도를 가면 가슴이 뛰는,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이 판단하고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고 말했다. 지난 19년 동안 끌어 온 난제가 재보궐선거 막바지에 졸속으로 처리된 것에 대한 문제 제기다. 포퓰리즘을 지적한 것이다.

 

포퓰리즘은 인민, 대중, 민중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포퓰루스(POPULUS)에서 유래된 것이다.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에는 '보통 사람들의 관심사를 지원하는 것', 케임브리지 사전에는 '보통 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사상과 활동'이라고 정의돼 있다. 사전적 정의만 보면 대중의 뜻을 따른다는 말로 그다지 나쁜 의미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정치권, 특히 선거와 관련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대부분의 포퓰리즘 공약들은 현실성이나 가치 판단, 옳고 그름 등을 외면한 채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대중영합주의와 동의어로 쓰인다. 

 

일반적으로 공약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경제의 지속 성장과 재정 건전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겨우 뜬구름에 그치고 만다. 특히 포퓰리즘 공약에는 청구서가 따른다. 중장기적으로 재정 부실화, 지속 가능한 성장 동력의 상실 등 국가 경제 운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 남미 국가들과 그리스가 대표적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오는 2025년 65%로 껑충 뛸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 2015년 40.78%에서 10년 새 24%포인트 넘게 오른다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에 대응하기 위해 수차례 추경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재정 여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그런데도 차기 대선에 출마하려는 후보들에게 나랏빚 걱정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오히려 이재명 경기지사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수백조원이 소요될 기본소득, 기본주택, 기본금융 등 퍼주기식 '기본 시리즈'를 쏟아내고 있다. 4·7 재보궐선거의 표심을 확인한 후 청년대책이라고 추가한 것이 고졸자에 대한 해외여행 경비 지원이다. 기본 시리즈도 그렇지만 1000만원의 여행경비 지원 역시 예산 추계나 재원 대책은 없다.

 

이재명 지사가 기본 시리즈를 밀고 나가자 더불어민주당의 대권 경쟁자인 이낙연 전 대표는 현재 7세까지 주는 아동수당을 18세까지 늘리자고 제안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도 이에 질세라 25세 청년에게 1억6000만원 정도의 기본자산을 만들어 주자는 구상을 내놓았다. 온갖 명목의 돈 풀기 공약도 문제이지만 규모 역시 국가 재정을 흔들 만큼 메가톤급이다.

 

이 때문에 실효성이나 재원 마련 대책 없이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우선 발표하고 보는 표퓰리즘 공약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유권자의 감성을 자극할 공약들을 통해 자신들의 잇속을 챙긴다는 것이다. 이들 정치인에게서 기업 활동에 제한을 주는 반시장적 정책, 선심성 복지정책을 점검해 보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구체적 대안도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의 정치학자 야스차 뭉크는 '위험한 민주주의'라는 저서를 통해 포퓰리즘이 '장사'가 잘 되는 이유를 제시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중의 단순화 경향이다. 

 

뭉크에 의하면 유권자들은 세상을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국내 제조업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리가 나오면 관세를 인상해 즉각 수입을 금지시킨다는 정치인의 말에 혹한다. 대형마트로 인해 전통시장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불만이 나오면 대형마트의 입점을 금지하거나 영업을 제한하겠다는 정치인의 손을 들어준다. 집값 폭등에 대한 불만에는 다주택 소유자에게 세금폭탄을 때려 이들이 집을 내놓게 하면 된다는 정치인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무리한 관세 부과는 무역분쟁을 불러오고, 다주택 소유자에 대한 세금폭탄은 '세금의 전가'를 가져올 수 있는 복잡한 현실은 외면한다. 한마디로 유권자는 확실하고 즉각적인 해결책이 없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듣기 좋은 소리만 하고, 책임을 물어 비난할 사람을 잘 찾는 포퓰리스트에게는 더 없이 좋은 환경이다. 포퓰리스트들이 사태나 사안을 그럴 듯 하게 규정짓는 네이밍(작명)을 잘하고, 희생양 찾기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진정성을 갖고 나라를 걱정할 정치 지도자나 정당이 필요하지만 흔치 않다. 내년 차기 대선을 치르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도 특별한 선택지는 보이지 않는다. 여당을 견제해야 할 야당까지 포퓰리즘 공약의 유혹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영화의 유명한 대사처럼 '묻고 더블로 가는' 막장 공약 경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유권자의 기본적 속성이 포퓰리즘 친화적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포퓰리즘의 폐해를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포퓰리즘으로 치닫는 사회가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번영의 길로 가는 사회도 있다. 시민의식(市民意識), 그리고 선거를 통해 포퓰리스트들의 발호를 봉쇄하기 때문이다. 대증적(對症的) 포퓰리즘 대신 귀에 착 감기지 않고 다소 복잡하더라도 현실성과 실효성 있는 공약에 유권자들의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 청년일보=정구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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