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한국과 미국의 양군(兩軍)은 매년 대규모 연합훈련을 실시한다. 전략적 목적은 북한의 전쟁 도발 억제다. 전술적으로는 매년 훈련의 성격이 다르다.
현재 수준의 한미연합훈련은 1969년 3월 포커스 레티나(Focus Retina)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됐다. 낙하산을 매고 뛰어내리는 공수훈련이 중심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 본토에서 출발한 82공정사단 병력 2500명이 수송기를 타고 30여 시간 만에 도착했다.
물론 포커스 레티나 훈련을 실시한 배경이 있다. 한국전쟁 다음으로 가장 긴장된 시기가 바로 이 때였기 때문이다. 1968년 1월 21일에는 김신조를 포함한 북한 124군 소속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했다. 이틀 후인 1월 23일에는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군에 납치됐다. 같은 해 가을에는 울진·삼척지구에 120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했다.
1960년대 한국의 국력과 군사력은 북한을 단독으로 막아내기 버겁던 시기였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연속된 도발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월남전에 발목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에 대한 무상 군사지원은 줄어들었다. 주한미군의 일부 병력도 월남전에 투입되면서 전력 공백까지 우려됐다.
한국은 상호방위조약을 행동으로 보여줄 것을 미국에 강력 요청했다. 미국은 주한미군 일부가 월남에 투입된다고 하더라도 한국 방위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이 같은 상황의 산물이 바로 포커스 레티나 훈련이다. 북한이 기습 남침하더라도 미국 본토에서 긴급히 증원군을 파병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다.
포커스 레티나 훈련은 1971년 프리덤 볼트(Freedom Bolt) 훈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주한미군 7사단을 월남으로 빼내면서 한국의 불만을 달래고, 북한에는 경고를 하려는 의도였다. 한국과 미국을 튼튼하게 연결한다는 의미에서 나사를 뜻하는 볼트가 훈련 이름에 들어갔다.
베트남 공산화 이후 북한의 도발 위협이 고조됨에 따라 1976년 팀 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이 시작됐다. 프리덤 볼트 훈련의 후신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 의지는 변함이 없다는 의미였다.
이후 한미 군사관계는 부침을 거듭했다. 지미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한 반면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반대로 주한미군을 증강시켰다. 팀 스피리트 훈련은 한미 양군의 최대 기동훈련으로 한때 20만명이 동원되기도 했다. 한미연합훈련이 매년 긴밀한 공조 하에 진행되면 연합작전 수행 능력은 향상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팀 스피리트 훈련은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중단됐다. 당시 미국의 로버트 갈루치 동아시아 차관보가 대북특사로 북한과 핵동결 협상을 할 때 북한이 팀 스피리트 훈련의 중단을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한미 양국은 핵동결을 위해 팀 스피리트 훈련 중단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북한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2006년 2차 핵 위기를 초래했다. 결과적으로 팀 스피리트 훈련만 없어진 셈이다.
한미 양국은 팀 스피리트 훈련을 대신해 1994년부터 전시증원연습(RSOI)을 실시했다. 이는 한반도 유사시 전개될 미군 증원 전력의 이동과 한국군의 지원 절차 등을 익히는 훈련이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과 전작권 전환 협상에 나섰고, 2008년 전시증원연습은 키 리졸브(Key Resolve) 훈련으로 다시 한번 바뀌게 된다.
한미연합훈련은 지난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줄곧 중단 또는 축소된 형태로 실시돼 왔다. 훈련 명칭조차 없이 '조용하게' 치른 경우도 있다.
이달 예정돼 있는 한미연합훈련도 비슷한 분위기다. 한미 군당국은 오는 10~13일 사전연습 성격인 위기관리참모훈련(CMST), 그리고 16~26일에는 후반기 연합지휘소훈련(21-2 CCPT)을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을 이유로 규모나 방식이 일부 조정될 가능성도 있다.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을 '북침 연습'이라고 주장하며 이의 중단을 반복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 1일 담화를 통해 한미연합훈련의 중단을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여정 부부장은 한미연합훈련이 예정대로 실시되면 “북남관계의 앞길을 더욱 흐리게 하는 재미없는 전주곡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를 놓고 여권은 딜레마에 빠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고 얼버무린 반면 여당 대표와 국회 국방위원장은 “예정대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여정 부부장의 한마디가 여권 내부까지 흔들어 놓은 양상이다.
북한의 한미연합훈련 중단 요구는 지난달 27일 남북 통신연락선을 복원하면서 예고됐던 수순이라는 시각도 있다. 북한이 한미연합훈련을 그냥 넘어갈 리도 없지만 먼저 불을 지핀 것이 우리 정부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통일부의 고위 당국자는 통신선 복원 사흘 만에 “한미연합훈련 연기가 바람직하다”며 연기론을 공식화했다. 남북 정상이 주고받았다는 친서에 한미연합훈련에 관한 사전 교감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이는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에서도 흔적이 발견된다.
김여정 부부장은 통신선 복원 이후 여권 일각에서 제기된 남북정상회담 기대에 대해 “섣부른 억측과 근거 없는 해석은 도리어 실망만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북한의 통신선 복원 조치는 남북정상회담에 목을 매고 있는 정부를 향해 '밑밥'을 던진 것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데도 통일부는 그걸 덥석 물어 한미연합훈련 연기론을 제기하고, 북한은 기다렸다는 듯 아예 중단하라고 윽박지른 것이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한미연합훈련에서 연대급 이상의 기동훈련은 없는 상태다. 훈련 없는 군대는 무용지물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위기관리참모훈련과 연합지휘소훈련마저 연기하자는 것은 북한의 요구에 끊임없이 끌려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북한은 그러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잠수함 발사 능력과 전술핵 개발 등 핵 능력을 고도화하고 있다. 진정성 있는 남북관계의 재개를 위해서는 한미연합훈련 연기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북한의 핵 능력 고도화 행위를 먼저 중단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한미연합훈련은 주한미군과 함께 한미동맹, 특히 국가안보를 지탱하는 핵심이다. 미 국방부는 지난 5월 “한미연합훈련은 동맹의 준비태세를 보장하는 주요한 방법”이라며 “한반도만큼 군사훈련이 중요한 곳은 없다”고 밝혔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미연합훈련을 대북 협상을 위한 카드나 지렛대 삼는 것은 자칫 안보를 거래하는 격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지극히 위험한 국방의 정치화라는 얘기다.
【 청년일보=정구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