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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한강의 기적' 일군 대한민국이 친일 세력과 美 점령군의 잔재?

이재명 지사 "친일 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지배 체제 그대로 유지"
개도국 졸업해 선진국 진입한 최초 국가 부정은 왜곡된 역사관의 발로

 

【 청년일보 】 역사관(歷史觀)은 역사 인식, 특히 역사학의 기본 틀이다. 일종의 패러다임으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역사관은 변한다. 당초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도덕과 종교에 기초한 관념사관이 지배했다. 이를 뒤엎은 것이 실증사관이다. 참과 거짓을 구별해 객관적 기록을 재구성하고, 선입견을 배제한 채 역사 자체의 법칙을 찾는데 주안점을 둔다.

 

실증사관은 역사학에 자연과학의 객관성을 도입한 것이었기 때문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인간의 인지 능력 자체가 주관성을 배제하고는 성립할 수 없다는 전제에다 자연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반론과 반증이 쌓여가면서 거센 도전을 받게 된다.

 

이후 역사관은 과거 자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증사관과 인간의 인식을 떠나서는 역사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상대주의를 모두 수용하게 된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E.H. 카는 객관과 주관으로 대립되는 역사관을 절충한 대표적 역사가다. 

 

실증사관 못지 않게 현대 사회에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유물사관이다. 물질과 자본에 의해 인간의 역사가 결정된다는 유물사관은 얼핏 관념사관과는 정반대로 보인다. 하지만 유물사관은 머리 속에 절대불변의 공식(관념)을 미리 정해 놓고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꿰맞춘다는 점에서 관념사관의 변종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물사관은 민중사관, 북한에서는 주체사관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민중사관과 주체사관의 뿌리가 유물사관이라는 것이다. 민중사관은 1980년대부터 역사학, 특히 한국사의 주류로 급부상한 이후 모든 분야를 평정한다. 민중예술, 민중민주주의, 민주(민중)노조가 대표적이다. 

 

일제 강점기는 식민사관이란 원치 않는 아이를 출산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실증주의에 기반한 국민사관으로 바뀌게 된다.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집중한 것이다. 민중사관은 이를 기회주의로 본다. 일반화의 오류지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76년이 흐른 지금도 식민사관 운운하는 것은 이미 증발한 '유령'과 싸우는 것이다. 

 

역사관 논쟁은 역사 교과서를 중심으로 여전히 진행중이다. 하지만 정치 무대에서는 수면 아래 잠자고 있었다. 이를 다시 소환한 것이 이재명 경기도지사다. 

 

이재명 지사는 지난 1일 대선 출마 선언 직후 고향인 경북 안동을 방문, 이육사 문화관을 찾는다. 그는 그곳에서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의 정부 수립 단계와는 달라 친일 청산을 못하고, 친일 세력이 미(美) 점령군과 합작해서 다시 그 지배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는 대한민국이 친일 세력 주도로 건국됐고, 미군이 점령군이라는 이재명 지사의 인식을 보여준다. 앞서 김원웅 광복회장도 고등학생 대상 강연에서 미군을 점령군, 소련군을 해방군이라고 했다. 이는 북한의 역사 교과서 격인 조선통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대한민국이 수치스럽고 더러운 탄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며 발끈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미숙한 좌파 운동권 논리를 이용해 당내 지지는 조금 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미래세대 지도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재명 지사는 비판이 이어지자 “저에 대한 (윤 전 총장의) 첫 정치 발언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제 발언을 왜곡 조작한 구태 색깔 공세라는 점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역사적 팩트를 말했을 뿐"이라며 “미 정부 공식 문서에 미군이 스스로를 점령군이라고 표현한 게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지사가 말하는 미 정부 공식 문서라는 것은 맥아더 사령부가 해방 직후 조선인을 대상으로 발표한 포고문을 의미한다. 맥아더 포고문의 제3조에는 미군을 점령군(occupying forces)이라고 표현한 단어가 있다. 하지만 포고문은 조선인이 해방의 주체며, 조선의 독립이 점령의 목적임을 분명히 한다.

 

실제 포고문은 "점령의 목적은 (일본이 조인한)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조선 인민의) 인간적·종교적 권리를 확보함에 있다"면서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 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한다"고 밝히고 있다. 

 

1945년 8월 15일로 돌아가보자.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한 뒤 38선 남북은 미국과 소련이 나눠 점령한다. 국제법상 미군과 소련군은 모두 점령군 지위였다. 점령의 일차적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치안 유지다. 맥아더 포고문 역시 맥아더 장군 마음대로 쓴 것이 아니다. 군사 점령에 대한 국제법, 즉 헤이그 규약에 따른 것이다. 

 

이 같은 전후맥락은 빼놓고 전교조 등 민중사관 추종자들은 포고문의 단어를 꼬투리 삼아 '미군=점령군'을 이미지화한다. 물론 여기에서의 점령군은 해방군과 대척점에 있다. 포고문의 'obey'란 단어 역시 '준수하다' 또는 '지키다'로 번역해야 함에도 "미군에게 강제 복종하라'는 뜻이라고 가르친다. 

 

이재명 지사가 이 같은 사실을 몰랐을까. 모르고 미 점령군 발언을 했다면 오세훈 시장의 말처럼 당내 지지를 얻기 위한 얄팍한 꼼수일 수 있다. 알고 그랬다면 이는 역사관의 발로다. 이재명 지사의 과거 발언이나 저서 등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재명 지사는 지난 2017년 출간한 자전적 에세이에서 “한반도 사드 배치 논란 속에 나는 또 하나의 역사적 경고음으로 동학혁명 당시의 한반도 상황을 떠올리곤 한다”고 했다.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외세의 침략이란 시각으로 바라본 셈이다.

 

이재명 지사는 “조선 땅으로 입성한 일본군은 계속해서 주둔하며 국정에 간섭했고, 기어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을사늑약과 식민지배로 이어지는 야욕의 프로세스를 진행해 나갔다”며 “물론 지금의 북한과 조선 말의 동학군을 단순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 문제는 미국 역시 당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 결코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라고 했다. 

 

특히 이재명 지사는 지난 2017년 1월 대선 경선 예비후보 등록 직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찾은 자리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친일 매국 세력의 아버지로 규정했다. 지난 3·1절 기념사에서는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말했다.

 

친일 청산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이 권력욕에 친일파와 야합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면면만 보더라도 각료 대부분은 항일운동 지도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건국 후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에 신생 독립국가의 보전이 최우선 과제였다. 남로당을 필두로 한 공산 세력의 준동은 현존하는 최대 위험이다. 군과 경찰, 그리고 행정 분야의 친일 경력을 배제하거나 척결의 우선순위에 둘 수 없었던 것도 이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오히려 김일성 정권의 초대 내각과 군부의 핵심 간부 상당수가 친일파로 구성됐다. 특히 김일성 집안 자체가 친일파를 대량 배출했다. 일본군 통역관으로 활동했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대표적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지난 2일 우리나라의 지위를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1964년 유엔무역개발회의가 설립된 이래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이동한 사례는 우리나라가 처음이다. 

 

개발도상국을 졸업해 선진국으로 진입한 최초의 국가 대한민국은 선배 세대의 피땀 어린 노력의 산물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나라를 세운 건국 세력,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낸 산업화 세력, 그리고 인권을 신장한 민주화 세력 등이 그들이다. 국내총생산(GDP) 세계 10위권의 대한민국을 두고 아직까지 국가 정체성을 의심하는 태도는 역사 퇴행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대한민국을 친일 세력의 잔재라고 비하하고, 6·25때 피를 함께 흘린 미군을 폄하하는 정치인의 발언에 상당수 국민은 의아해 하고 있다. 국민은 이재명 지사가 주장하는 미 점령군의 사전적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재명 지사의 역사관이 민중사관 또는 유물사관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그것이야 말로 대한민국의 정체성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 청년일보=정구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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