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지난 2000년 대학 입학을 위한 수능 지원자 수는 90만명에 육박했다. 2021년에는 49만3433명이다. 20년 사이에 절반 가까이 줄어든 셈인데, 수능 지원자 수가 50만명 밑으로 떨어진 것은 1994년 수능 제도가 시작된 이후 처음이다.
전문대를 포함한 올해 대학 입학 정원은 48만470명이다. 그런데 통상 수능 결시율은 10%다. 이를 감안하면 대학 입학 정원보다 수험생이 더 적은 '대입 역전 현상'이 본격화된 것이다.
올해 초 전북의 모(某) 대학은 이색적인 추가 모집 공고를 냈다. 수능에 응시하지 않은 학생도 지원할 수 있고, 신청하면 100% 합격을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고교 졸업장만 있으면 다 받아준다는 것이다.
이 대학은 지난 1월부터 2월 말까지 6차례나 추가 모집을 했다. 하지만 정원을 다 채우지 못했다. 입학 지원자 수가 정원에 300명 가까이 부족해 '고육책'을 내놓았지만 그마저도 무위로 돌아간 셈이다.
원서만 내면 합격하는 대학은 이 곳만이 아니다. 전국의 지방대 곳곳에서 무조건 오기만 하면 받아준다는 문구를 내걸고 추가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 특히 수도권에서 먼 영남과 호남지역 대학일수록 이 같은 양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 때문에 대학가에서는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한다'는 속설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일부 지방대는 대입 전형의 개편까지 고려하고 있다. 추가 모집 전형을 바꿔 먼저 지원하는 순(順)으로 합격을 결정하는 방식인데, 지금까지 대입 전형에서 '선착순' 합격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럼에도 지방대가 이 같은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은 '폐교'라는 극단적 결과를 막기 위한 생존 전략이기 때문이다.
지방대 위기의 일차적 요인은 학령(學齡) 인구의 감소다. 학령 인구 감소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면서 대학 입학 지원자 수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오는 2024년 대학 진학 가능 인구는 37만3470명에 불과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입학 정원 48만470명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정하면 2024년 대학 신입생은 10만7000명이나 모자라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달리 말해 전국 대학 입학 정원의 22.3%를 채울 수 없게 되는 셈이다. 이는 단순 계산해도 전국 340개 대학 중 76개 대학이 신입생을 1명도 못 뽑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대학교육연구소의 지난해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비(非) 수도권 대학 가운데 신입생 정원의 70%를 못 채우는 곳이 전체의 34%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또한 정원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는 대학은 12%로 예상됐다.
올해 만 3세 어린이가 대학에 입학하는 2037년에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진다. 신입생 충원율 70% 미만인 지방대는 209곳으로 전체의 84%로 예상됐다. 정원의 절반도 못 채우는 지방대는 33.7%, 즉 3곳 중 1곳에 달할 것으로 분석됐다. 사실상 대부분의 지방대가 고사(枯死) 위기에 직면한다는 얘기다.
신입생 미충원 문제는 지방대의 재정 악화로 이어져 결국 폐교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 또한 지방대의 몰락은 대학 구성원뿐 아니라 지역 상권의 붕괴 등 다양한 사회 문제로 비화된다. 특히 인구의 수도권 집중으로 지방 소멸이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지방대까지 몰락하면 단순히 상아탑 붕괴를 넘어 국가의 균형발전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실제 지방대가 폐교되면 직장을 잃은 교직원의 삶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학생들은 인근 대학에 특별 편·입학할 수 있지만 유사 전공이 없거나 교육 과정이 달라 학습권에 상당한 침해를 받는다. 또한 대학 건물의 관리가 부실해지면서 주변이 일종의 우범지대처럼 전락할 수도 있다. 슬럼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지방대가 신입생 미충원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가운데 설립되는 한국에너지공과대학(한전공대)은 설상가상의 상황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기존에 있는 대학도 문을 닫아야 하는 판에 새로운 대학을 설립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막대한 사업비를 차라리 폐교 위기에 몰린 지방대의 혁신에 써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전공대 설립은 정치인의 입에서 시작됐다. 지난 3월 국회에서 '한국에너지공과대학법'이 통과되자 당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페이스북에 "한전공대는 저의 전남 도지사 선거 공약이었다"고 밝혔다. 전남에서 추진한 한전공대 구상은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공약에 포함됐다.
지지부진하던 한전공대 설립은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 뒤 속도를 냈다. 2017년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들어간 한전공대 설립은 당초 2026년을 목표로 추진됐다. 하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여당이 한전공대 설립 요건을 대폭 완화한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내년 대선 시기인 3월 개교로 앞당겨졌다.
정부는 국민이 내는 전기요금에서 3.7%씩 떼어내 조성하는 전력산업기반기금으로 한전공대 설립·운영 비용을 충당할 수 있도록 전기사업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특히 누적 부채가 132조원에 달하는 한국전력은 한전공대 설립·운영 비용 1조6000억원 중 1조원을 부담한다. 결국 한국전력의 재무 상황이 악화되면 전기요금이나 국가 재정으로 메워줄 수 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한국전력의 막대한 비용 부담은 소위 '일류 대학'을 만들기 위한 투자 계획에서 비롯한다. 한국전력은 지난 2018년 '한전공대 설립 용역 중간 보고회'를 열고 학생 1000명(대학원 600명·학부 400명)의 등록금을 면제해 준다고 밝혔다. 또한 우수 교수진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대학 교수 연봉의 3배 이상인 4억원을 지급할 계획이다. 모두 한국전력의 부담을 늘리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에는 카이스트(KAIST·대전), 포스텍(POSTECH·포항), 지스트(GIST·광주), 디지스트(DGIST·대구), 유니스트(UNIST·울산) 등 전국에 5곳이나 되는 이공계 특성화 대학이 있다. 이들 특성화 대학 5곳에는 모두 에너지 관련 학과가 개설돼 있고, 특히 지스트는 나주와 가깝다. 기능 중첩은 물론이고 학령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중복 투자라는 점에서 반대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한전공대의 소관 부처는 교육부가 아니다. 지원과 육성, 업무 조정과 감독을 모두 산업통상자원부가 맡는다. 이 때문에 한전공대는 교육부의 대학 구조개혁 평가인 '대학 기본 역량 진단'도 받지 않는다. 다른 대학들은 이 평가에서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하면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정원 감축 압박도 받는다. 하지만 한전공대는 예외다.
학생 선발 방식도 논란이다. 한전공대 입학은 수시 90%, 정시 10%로 이뤄진다. 대부분 수시 모집인 셈이다. 이처럼 내신과 수능을 거의 배제한 선발 방식은 입시의 공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더구나 한전공대는 다른 대학보다 입학과 동시에 한국전력에 취업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부모 찬스'가 횡행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1일 한전공대가 들어설 나주시 빛가람 혁신도시에서는 김부겸 국무총리, 김영록 전남지사, 그리고 여권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한전공대 착공식이 열렸다. 오는 9월 수시 모집을 석 달여 앞두고 터닦기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대학 측은 우선 급한대로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의 건물 1동(棟)을 지어 임시 사용 승인을 받는다는 방침이다.
대학 측은 학생들 전원에게 기숙사 무료 제공을 약속했다. 하지만 기숙사는 2025년 전까지 완공한다는 계획만 있을 뿐이다. 100명을 목표로 하고 있는 교수진 충원도 지지부진하다. 당장 내년 3월 개교를 앞두고 있지만 현재까지 대학 측이 확보한 교수진은 22명이다. 올해 말까지 33명을 충원한다는 계획이지만 계획대로 된다고 해도 충원율은 33%에 그친다. 대학 측은 교수들 명단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무리수는 결국 대선(大選)이 치러지는 내년 3월 개교라는 '정치 시간표'에 따른 것이다. 전국의 유령 공항, 새만금 개발처럼 선거에서 표(票)를 얻기 위한 선심 공약이라는 얘기다. 이들 공약은 이미 나라의 곳간을 거덜내고 있다. 한전공대 공약은 더욱 우려된다. 이는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하는 교육마저 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청년일보=정구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