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반도체는 메모리 반도체와 비메모리 반도체로 나뉜다. 메모리 반도체는 정보를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되는데, 주로 휴대폰이나 PC 등에 들어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를 석권하고 있지만 적은 이윤으로 대량 판매하기 때문에 부가가치가 낮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정보를 처리하기 위한 연산, 추론 등의 목적으로 사용된다. 비메모리 반도체라는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시스템 반도체로 불린다. 컴퓨터의 두뇌로 불리는 중앙처리장치(CPU), 스마트폰에서 CPU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자동차에 들어가 다양한 기능을 조정하는 차량용 반도체가 여기에 속한다.
이 뿐만 아니다. 전력용 반도체, 이미지 센서, 인공지능(AI) 반도체 역시 시스템 반도체다. 수익률이 좋고 시장이 큰 고부가가치 반도체이지만 진입 장벽이 높다. 현재 시스템 반도체는 전체 반도체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분야의 최강자는 대만의 TSMC로 시장 점유율이 55%나 된다. 삼성전자는 고작 3% 수준이다. 특히 차량용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2.3%에 머물고 있다.
차량용 반도체는 미래 모빌리티 산업의 승패를 좌우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전기자동차, 자율주행자동차로 요약되는 미래 모빌리티 산업에서 차량용 반도체는 경쟁력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시장 규모 역시 지난해 450억 달러에서 오는 2040년에는 1750억 달러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재 차량용 반도체는 네덜란드의 NXP, 미국의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독일의 인피니언 테크놀로지, 일본의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 스위스의 ST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이 주도하고 있다. 이 가운데 NXP는 지난 2006년 필립스에서 분사·설립된 차량용 반도체 분야의 세계 최대 기업이다. 미미한 수준이지만 TSMC도 차량용 반도체를 만든다.
미래 모빌리티는 '바퀴 달린 컴퓨터', '바퀴 달린 이동식 스마트폰'으로 불리기도 한다. 내연기관으로 상징되는 자동차 산업이 앞으로는 IT와 반도체 융합산업으로 탈바꿈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자율주행자동차에는 2000개 이상의 반도체가 필요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현재 일반 자동차에 탑재되는 반도체만 해도 200~300개에 이른다.
현재 국내 자동차 부품사 10곳 가운데 8곳은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을 겪고 있다. 물량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 5~6월이 차량용 반도체 '보릿고개'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사실상 올해 3분기까지 수급난이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 때문에 차량용 반도체 현물시장이 있는 싱가포르로 달려가는 자동차 부품사들이 잇따르고 있다. 정상가격의 10~20% 웃돈을 내면 브로커가 차량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로부터 물건을 먼저 받아다 주는 것이다. 이를 차량용 반도체 급행료라고 하는데, 정상가격보다 30%의 웃돈을 내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상황이다.
현재 완성차 업체들은 고육지책으로 차량용 반도체가 필요한 옵션 사양을 뺀 차량을 출시하며 버티기에 나선 상태다. 하지만 자동차 부품사들은 차량용 반도체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도 타격을 입는다. 차량용 반도체 때문에 완성차 공장이 멈추면 브레이크 같은 여타 부품도 납품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현재 자동차 부품사의 공장 가동률은 50%를 밑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 업계의 '불안한 생산'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최근 차량용 반도체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게 된 이유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사태 발생 이후 수요 예측에 실패한 탓이다. 완성차 업체들이 코로나 19로 자동차 수요가 감소할 것이라고 판단해 차량용 반도체 주문량을 줄이자 파운드리 업체들이 생산라인을 게임, PC, 가전제품 용도의 반도체 생산으로 돌린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 수요는 당초 예측보다 줄지 않았다. 완성차 업체들이 뒤늦게 차량용 반도체 주문에 나섰지만 파운드리 업체들의 대응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여기에 한파로 인피니언 테크놀로지의 미국 차량용 반도체 공장 가동이 중단됐다. 세계 3위 차량용 반도체 제조업체인 일본의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 역시 공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 같은 재해와 사고가 겹치면서 수급난이 더욱 심화된 것이다.
이번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을 계기로 시스템 반도체 등 우리 산업에 필요한 반도체는 자체 생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해마다 반도체 시설투자에 30조원 안팎을 쏟아붓고 있는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연구개발(R&D) 및 시설투자에 133조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시스템 반도체 등 차세대 반도체 생태계 조성에 민간기업만 애를 쓰고 있는 형국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국가 차원의 장기 전략이나 투자가 경쟁국과 비교해 너무 허술하다는 얘기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최근의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을 국가안보 위기로 규정했다. 반도체를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본 것이다. 특히 반도체를 21세기 미국의 핵심 인프라로 꼽았다. 바이든 행정부가 2조2500억 달러를 투입하는 사회간접자본(SOC) 부양책 가운데 500억 달러(56조원)를 반도체 산업 육성에 집중하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은 지난 2015년 자국 제조업을 2025년까지 독일과 일본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야심찬 '중국제조 2025'를 발표했는데, 이 중에서도 반도체에만 170조원을 쏟아붓기로 했다. 또한 중국은 전문인력 확보와 함께 미국ㆍ일본ㆍ유럽 반도체 업체의 인수합병(M&A)도 집요하게 추진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아시아 파운드리 업체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독일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네덜란드 등이 최대 500억 유로(67조5000억원)를 투자하기로 합의한 상태다. 유럽연합은 2030년까지 현재 10% 수준인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0%로 높인다는 목표다. 미국, 중국, 유럽연합 등 주요국들이 반도체 주도권 확보를 위해 재정 투자 등 화력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세제지원도 패키지로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은 오는 2024년까지 반도체 설비투자는 물론 기존에 설치된 반도체 장비에 대해서도 40%까지 환급해주겠다는 세액공제 방안을 내놨다. 중국의 경우 15년 이상 운영한 반도체 기업이 최첨단 공정에 투자하면 법인세를 10년간 면제해 준다.
우리나라 정부의 투자와 세제지원은 이들 나라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수준이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부가 반도체에 추가 지원하겠다고 밝힌 2800억원 중 실질적인 정부 자금은 500억원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발표된 다른 지원안을 모두 포함해도 10년간 2조원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현재 우리나라 대기업에 적용되는 연구개발과 시설투자 세액공제는 일반 공제, 신성장원천기술 공제 등 크게 두 가지다. 일반 공제는 연구개발 투자금의 0~2%, 시설투자는 1%의 공제율이 적용된다. 시설투자에 100억원을 썼다면 기업이 내야 할 세금 가운데 1억원을 깎아준다는 의미다.
신성장원천기술 공제율은 연구개발의 경우 20~30%지만 시설투자는 3%다.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에 유독 인색하다는 말이 나온다. 대만이 TSMC, 미국이 인텔같은 대표선수를 세계적 기업이 되도록 대놓고 지원하는 것과 천양지차다.
반도체는 이제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안보자산이 됐다. 우리 정부 역시 오는 13일 'K-반도체 벨트 전략'을 발표한다는 계획이다. 기업이 반도체 생산 능력을 적기에 확충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과 시설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를 늘리는 내용이 골자를 이룰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반도체 업계는 말로만 지원에 끝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10대 공약 중 하나가 반부패·재벌개혁이고, 반기업·친노조가 현 정권의 핵심 철학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반(反)기업 정서가 강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트라우마인 셈이다. 무엇보다 반도체 세계대전의 격변기에 삼성전자의 총수는 투옥돼 있는 상태다.
【 청년일보=정구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