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재벌 3·4세의 일탈 행위가 또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기업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와 윤리경영을 앞세우고 있지만 정작 이들은 기업 이미지 훼손의 진앙(震央)이 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을 비롯한 현대가(家)가 대표적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현대자동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사태에도 불구하고 올해 2분기 판매 실적이 103만1349대에 달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6.5% 늘어난 것이다. 매출액은 38.7% 증가한 30조3261억원, 영업이익은 무려 219.5% 늘어난 1조8860억원을 기록했다. 차량용 반도체의 수급 불안과 비우호적인 환율 영향 속에서 이루어낸 값진 결과다.
기아자동차도 마찬가지. 판매 실적은 전년 동기 대비 46.1% 증가한 75만4117대를 기록했고, 매출액은 18조3395억원으로 61.3% 늘어났다. 특히 영업이익은 1조4872억원으로 924.5%나 증가하는 고공행진을 했다.
이처럼 호실적을 거둔 상황에서 정의선 회장의 장남인 정창철(22)씨가 음주운전으로 수사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윤창호법 시행 이후 음주운전은 살인 행위라는 사회적 인식이 강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비판의 강도는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동부지검은 정창철씨를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벌금 900만원에 약식 기소했다. 정창철씨는 지난달 24일 오전 4시 45분경 만취 상태로 GV80 차량을 운전하다 서울 광진구 강변북로 영동대교 램프에서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정창철씨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64%로 면허취소 수준인 0.08%를 넘어선 것으로 조사됐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혈중 알코올 농도 0.164%는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의 만취 수준인 경우가 많다.
현대자동차그룹으로서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정의선 회장의 뒤를 이어 향후 현대자동차그룹을 이끌게 될 유력 후계자의 공식 언론 데뷔가 음주운전이라는 점에서다. 더구나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코로나 19로 온 국민이 고강도 방역 대책을 감내하면서 고통을 분담하고 있는 때였다.
정창철씨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아파트에서 지인과 술을 마시다 운전대를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검찰이 코로나 19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 수칙 위반에 대해서도 수사할 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현재 코로나 19의 재확산으로 오후 6시 이후에는 2명까지만 모임이 허용된다.
지난 2006년 정몽구 명예회장과 정의선 회장 부자(父子)는 보유하고 있는 현대글로비스 주식 전량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검찰이 정몽구 명예회장의 비자금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하자 비자금 조성 과정의 핵심 계열사인 현대글로비스의 지분을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정몽구 명예회장과 정의선 회장 부자가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은 각각 28.1%, 31.9%로 지분 가치는 약 1조원에 달했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이후 횡령 및 배임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으며,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자신이 설립한 정몽구 재단에 기부했다.
반면 부친과 함께 지분을 기부하기로 했던 정의선 회장은 여전히 현대글로비스 지분 23.29%를 쥐고 있다. 이처럼 15년이 지나도록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현대글로비스 지분이 정의선 회장의 지배구조 개편에 핵심적 '키'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어의 눈물'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다.
도쿄올림픽에서 잇따라 금메달을 따낸 양궁 국가대표팀의 선전으로 대한양궁협회장을 맡고 있는 정의선 회장은 물론 현대자동차그룹도 호평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터진 음주운전 사건은 초대형 악재다. 정의선 회장 입장에서는 부정 여론을 대거 털어내면서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리게 된 셈이다.
현대그룹을 창업한 고(故) 정주영 회장은 일곱명의 동생은 물론 슬하에 9남매(8남1녀)를 두었다. 대가족을 거느린 것이다.
현대가의 2세들이 몽(夢)자 돌림이라면 3세들은 아들이 선(宣)자, 딸은 이(伊)자 돌림을 쓴다. 4세는 대부분 아들의 경우 '창'자, 딸은 '진'자 돌림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는 속담도 있지만 유독 현대가에서는 각종 사건사고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다.
정주영 회장의 8남 정몽일 현대엠파트너스 회장의 장남인 정현선 현대기술투자 상무는 지난 2018년 2월부터 2019년 1월까지 액상 대마(마리화나) 카트리지를 26차례 흡입한 혐의가 적발돼 구속 기소됐다. 하지만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정현선 상무의 여동생인 정문이씨는 지난 2012년 8월 서울 성북동 주택가 골목길에 세워둔 차 안에서 한 남성으로부터 대마초를 전해 받고 함께 피운 혐의가 적발돼 불구속 기소됐다. 정문이씨는 이듬해인 2013년 4월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대마 사건은 이뿐만이 아니다.
고(故) 정순영 성우그룹 회장은 정주영 회장의 둘째 동생이다. 그리고 정순영 회장의 3남 정몽훈 성우효광그룹 회장의 장남이 정광선 이사인데, 그 역시 지난 2013년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구속됐다. 경기도 오산에서 주한미군 전용 군사우편을 통해 국내로 밀반입된 대마초를 구입해 흡연한 것이다.
앞서 정순영 회장의 4남 정몽용 현대성우홀딩스 회장의 장남인 정인선씨는 지난 2009년 대마초 흡연 혐의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정인선씨와 정광선 이사는 사촌지간이다.
수행기사를 상대로 황당한 매뉴얼을 만들어 놓고 '갑질'을 일삼은 정일선 현대BNG스틸 사장은 현대가 3·4세 일탈 행위의 정점을 찍는다. 정일선 사장은 정주영 회장의 넷째 아들인 고(故)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회장의 장남이다.
정일선 사장은 3년 간 수행기사 61명을 주 56시간 이상 일하게 하고, 이 가운데 1명을 폭행한 혐의로 약식기소돼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수행기사 매뉴얼에는 모닝콜과 초인종 누르는 시기와 방법, 신문 두는 위치, 차량 안 물품 구비부터 운동복 애벌 빨래법 등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야 할 일들이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수행기사들은 매뉴얼을 지키지 못할 경우 경위서를 쓰고 벌점을 받아 감봉 조치를 당했다.
발렌베리는 스웨덴 최대의 금융 가문이다. 해군 장교 출신인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은행을 열면서 창업했다. 이 가문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으로 꼽히는데, 후계자 요건도 엄격하다. 적합한 후계자가 있을 경우에만 경영을 세습하는 것은 물론 후계자는 혼자의 힘으로 명문대학을 졸업해야 한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요건도 있다.
현대가 3·4세의 각종 일탈 행위에 견주어 보면 '범접불가'다. 더구나 현대가 3·4세들은 각종 사건사고에도 불구하고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음주운전에 마약하고 갑질을 해도 소리소문 없이 묻히기 일쑤다. 지탄받는 '유전무죄(有錢無罪)'가 여전히 통용되면서 오너 경영에 대한 불신만 초래하고 있다. 사상누각이자 신기루인 셈이다.
【 청년일보=정구영 기자 】